소서노(召西弩) 여제(女帝)와 온조(溫祚) 대왕(大王)의 사라진 13년의 이야기(3)

  • 등록 2022.10.26 17:54:18
  • 조회수 75
크게보기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호원동 산 55-1.

 

인천 소래를 거쳐, 부천 노고산을 거쳐, 마포나루를 거쳐, 마포구 할미산을 거쳐 은평구를 거쳐, 양주 장흥을 거쳐, 의정부 홍복산을 거쳐, 녹양동 버들개를 거쳐, 양주 어하고개를 거쳐, 포천 소흘읍 비득재를 거쳐, 남양주 별내면 용암리 비루개를 거쳐, 의정부 고산동 비루개를 거쳐 여황제 소서노와 그의 두 아들 비류왕자와 온조왕자가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마침내 도착한 곳의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여한 현주소입니다.

 

 

그런데 왜? 소서노여제와 두 왕자들은 당시에 꽤나 먼 거리였을 이 길을 수많은 사람들까지 거느리고 이동을 해야만 했을까요?

그들의 주목적은 고인돌이 있느냐 없느냐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에게~. 겨우 그 이유 때문에 그 먼 길을 찾아다녔다고?

그렇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고인돌이 많은 지역이 어디냐를 찾고자 했던 겁니다.

고인돌이 뭔데 그 당시엔 어마어마한 이동 프로젝트를 감행해야 했던 걸까요?

그것은 고인돌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고인돌의 수가 많을수록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자연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근거가 되죠.

고인돌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물이 있을 것이고 열매가 많이 열리는 곳이면서 동물들이 많이 산다는 또 다른 증거니까요.

소서노여제와 두 왕자들은 의정부 고산동 비루개를 거쳐 요즘 아파트 정신없이 들어서는 넓은 땅 민락 2지구에 들어서면서 발견되는 고인돌의 수에 감탄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고산동 188번지 뒷편 소로와 갓바위 마을에 산재되어 있는 고인돌들을 필두로,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볕고개(영석고 앞 고개. 지금은 백고개, 공고개라고도 함. 옛지명은 곰고개였음.)의 장골과 대장골에 세워진 거대한 고인돌을 확인하고, 신곡동 유앤아이아파트 자리에 놓인 청룡부리를 거쳐 샛강을 따라 지금의 회룡분지인 호원동 산 55-1에서 그동안의 고된 짊을 풀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호원동 산 55-1. 회룡분지가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이냐?

이곳이 바로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최고 천재 중 한명인 다산 정약용이 그렇게 찾아 헤맸다던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이 바로~바로~. 의정부 회룡분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은 들어봤어도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은 금시초문인데?

그렇습니다.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은 십제(十濟)이면서 나중에 백제(百濟)로 성장하는 출발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현재 하남 시(市)와 서울 풍납동(풍납토성)이 서로 자기네 동네가 원조라고 싸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이 있기 전에 한강 이북에는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이름은 온조국(溫祚國).

그러니까 정리해보면 십제(十濟)이면서 나중에 백제(百濟)가 되는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 이전에 이 모든 불씨가 되는 최초의 국가 온조국(溫祚國)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이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신박신박 신동명 박사님의 주장은 뜬금없어서 믿을 수가 없다고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의 존재와 관련한 소중한 정보 하나 투척해 봅니다.

 

「夏五月(하오월) 王謂臣下曰(왕위신하왈) 國家東有樂浪(국가동유락랑) 北有靺鞨(북유말갈) 侵(침)질疆境(강경) 少有寧日(소유녕일) 況今妖祥屢見(황금요상루견) 國母棄養(국모기양) 勢不自安(세불자안) 必將遷國(필장천국) 予昨出巡(여작출순) 觀漢水之南(관한수지남) 土壤膏(토양고) 宜都於彼(의도어피) 以圖久安之計(이도구안지계)"」

-온조왕(溫祚王) 13년 여름 5월 왕은 신하더러 이르기를 "국가가 동으로는 나라(樂浪)가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략하여 편할 날이 없는데, 하물며 궂은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아무래도 편안하지 아니할 것 같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한강의 남쪽을 순시한바 토지가 매우 기름지다. 거기에 도읍 하여 장구의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秋七月(추칠월) 就漢山下(취한산하) 立柵(립책) 移慰禮城民戶(이위례성민호)」

-온조왕(溫祚王) 13년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기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기(溫祚紀)

 

 

자! 어떠세요. 아하. 하남으로 내려가기 전에 정말로 또 하나의 위례성이 있었구나 인정하시죠! 그것도 하북에 말입니다.

이 내용을 발견한 정약용은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을 찾아내려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경성 혜화문 밖 10리 못되는 삼각산 동록(東麓: 현재 우이동)에 고성의 흔적이 있는데 거민들은 이를 한양고현이라고 한다.”라고 주장하며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의 위치를 북한산 우이동으로 비정하죠.

아~~! 왜 그러셨어요. 정약용 할아버지. 쫌만 더 쓰시지. 의정부에 오셨어야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이 여기구나 하셨을 텐데.

뭐 어쩌겠어요. 정약용 할아버지가 못 찾으셨으면 후손들이 해야 하는 법. 의정부에 사는 동명이가 나서서 증명하는 수밖에요.

 

호원동 산 55-1. 회룡분지에 자리 잡은 소서노 여제와 두 왕자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늘에 천제(天祭)를 지내기 위한 제단(壇)쌓기, 즉, 천단(天壇)의 구축

거암(巨巖)에 하늘의 별자리를 새겨 넣기, 성혈(性穴)의 작업이었죠.

하늘의 자손, 천손족(天孫族)이자 동명족(東明族)인 배달국 고조선의 자손들은 나라를 세울 때, '천단(天壇)'과 '성혈(性穴)' 이 두 가지는 빼놓으면 안 되는 필수 조건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위례성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일단 확인해야할 몇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위례성(도읍지)은 도시여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활동하기에 불편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평평한 분지가 좋지만, 적이 침략했을 때 큰 힘 안들이고 방어해야 하니까 앞에는 큰 강이 흐르고 뒤에는 오르기 어려우면서 등선이 좁은 산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거기에 장기적인 싸움을 대비하여 병사들이나 백성들이 숨어 지낼 큰 동굴이 있어야 하고 산꼭대기에는 1년 내내 마르지 않고 물이 펑펑 솟아나는 샘물이 있어야만 합니다. 전쟁에서 밀릴 때 퇴로(退路) 확보를 위한 조치죠.

이러한 조건이 모두 확인되어야 그때사 성곽을 두르고 목책을 세워 도읍지인 위례성을 건설하게 되는 겁니다.

난공불락의 요새. 이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곳이 바로 고구려의 출발지인 ‘오녀산성(五女山城)이고 이 지역을 그대로 빼닮은 곳이 호원동 산 55-1. ’회룡분지(回龍盆地)‘라고 보시면 됩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병사들이나 백성들이 숨어 지낼 큰 동굴은 어디에 있나요?

호원동 산 27번지(의정부시 범골로 35-283), 호암사 경내에 ‘백인굴: 범굴이라고도 하고 통로가 위 아래로 두 개가 있으며 200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는 큰 동굴임’이라고 있어요. 이 동굴이 바로 고구려를 대표하는 거대한 동굴 ‘국동대혈(國東大穴)’의 역할을 한 겁니다.

그럼 1년 내내 마르지 않고 물이 펑펑 솟아나는 샘물은 어디에 있나요?

호원동 도봉산 꼭대기에 있는 망월사(望月寺)에 올라 해탈문(解脫門) 안으로 쑥 들어가면 고래처럼 거대한 바위 아래에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샘솟는 신비의 용정(龍井: 용의 우물)이 있습니다. 이 샘물이 바로 오녀산성 꼭대기에 있는 천지(天池)인 셈이죠.

그런데 의정부는 큰 강이 없는 걸로 아는데?

‘의정부 지명밟기 이야기 시리즈’ 앞부분에서 수도 없이 다루어지는 내용이지만 중랑천(中浪川)이 큰 강입니다. 못 믿으시겠다고요? 옛 선조님들이 중랑천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잠시 짚어드리고 가실게요. 중랑천(中浪川)에 ‘浪’ 있죠. 이 단어는 바닷가에만 붙이는 거예요. 바다만큼 큰 강이라는 뜻인 거죠. 그리고 조선 개국 시기의 기록을 보면 중랑천 주변 동네이름이 해등촌(海等村: 바다와 동등한 강 주변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사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옛 선조님들은 중랑천(中浪川)을 바다처럼 넓고 큰 강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중랑천(中浪川)이 오녀산성 앞을 도도하게 흐르는 졸본천(비류수, 엄리수, 혼강)의 역할을 맡았던 겁니다.

이제 이 글의 마지막 숙제!

하늘의 자손, 천손족(天孫族)이자 동명족(東明族)인 배달국 고조선의 자손들은 나라를 세울 때 그렇게 중요시한다는 '천단(天壇)'과 '성혈(性穴)'은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겁니까?

그렇죠. 이런 질문이 나와야죠.

하나는 사패산 정상에 있고 또 하나는 수락산 정상에 있습니다.

회룡사 뒤 석굴암에서 북쪽으로 400미터 올라가다 우편으로 꺾어서 100여 미터 지나서 50여 미터 정상으로 올라가면 확인이 가능하고, 장암동 수락산 쌍암사에서 6~700미터 걸어 올라가면 온조국(溫祚國) 온조대왕의 역사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문상 기자 jusinkhan@naver.com
Copyright @아임뉴스 Corp. All rights reserved.


(주)중앙방송 아임뉴스 서울특별시 구로구 디지털로 32나길 35, 609호
등록번호 : 서울,아53869 | 등록일 : 2021-08-04 | 발행/편집: 김건환 | 전화번호 : 02)6013-6670 | 팩스 : 0504)386-6670
Copyright @아임뉴스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