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따라 역사찾아> 의정부를 다시 품다. 2

  • 등록 2022.08.17 18: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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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는 세 명의 군주(君主)가 탄생한 명당(明堂)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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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8년에 온조(溫祚) 왕자(王子)는 온조국(溫祚國)을 세우고 온조 대왕(大王)이 됩니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라고 아래의 글은 증명합니다.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의 남쪽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와 같은 지세의 험준함과 이점은 얻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온조에게 귀부하였다. 그 뒤에 올 때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씨(氏)로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 왕조

 

그리고 하남으로 내려가서 하남위례성을 건설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짓죠.

거기서 더 발전하여 경기도 안성 쪽으로 내려가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고 다시 변경합니다.

아래의 간단 정리 목록은 위에 제시된 내용이 여러 가지 종합된 자료다보니 체계성 없이 읽으면 헷갈리기 십상이라, 하남위례성으로 내려가기 전 사라진 온조대왕의 13년 역사를 간단하게 이해시키고자 정리해봅니다.

 

사라진 온조대왕의 13년의 역사 간단 정리

 

一年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一年夏五月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다

二年春一月 말갈에 대한 방어 대책 마련을 지시하다

二年春三月 을음을 우보에 임명하다

三年秋九月 말갈을 크게 격파하다

三年冬十月 겨울에 우레가 일어나고 복숭아, 오얏꽃이 피다

四年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다

四年秋八月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 맺다

五年冬十月 사냥하여 사슴을 잡다

六年秋七月 일식이 나타나다

八年春二月 말갈을 크게 격파하다

八年秋七月 백제와 낙랑의 우호 관계가 단절되다

十年秋九月 신기한 사슴을 잡아 마한에 보내다

十年冬十月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입하다

十一年夏四月 말갈이 낙랑의 부탁을 받고 병산책을 공격하다

十一年秋七月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다

十三年春二月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오다

十三年 왕의 모후가 죽다

十三年夏五月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를 계획하다

十三年秋七月 하남 위례성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다

《삼국사기》 <시조 온조왕 본기>

 

아! 13년 동안 온조대왕님은 뭔가를 많이 하셨네. 하남에 내려가시기 전에 말입니다.

그런데 맨 위에 제시된 내용으로는 아래의 자료에 제시된 이 13년을 담을 수가 없게 되는 거죠. 왜냐? 한산 부아악에 올라 좋은 땅을 찾아보니 한수 남쪽에 좋은 땅이 하남에 있어 거기에 위례성을 조성하고 도읍지로 정하여 나라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그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이다. 이래버리면 처음 시작할 때부터 하남에 십제라는 나라를 세우고 시작한 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

하남으로 내려가지 전 의정부 회룡분지에서 13년 계시면서 많은 일을 하셨다는 거.

13년 동안 의정부에 있었던 그 나라 이름은 온조국(溫祚國)이라는 거.

그래서 의정부에서 탄생한 서열 1위 첫 번째 군주(君主)는 바로 온조대왕 되시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 군주(君主)의 탄생도 있나요? 넵.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바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입니다. 그런데 이 분도 회룡분지(回龍盆地)를 근거지로 두고 왕이 되십니다.

같은 회룡분지(回龍盆地)를 끼고 일어난 두 군주(君主)의 탄생.

와우~. 정말 멋진 일 아닙니까!

아래의 내용은 태조 이성계가 의정부에서 배출된 두 번째 군주(君主)라고 주장하는 내용의 뒷받침 근거들입니다.

 

45. 무학골(無學谷)

무학골은 배나무골 너머 동쪽 골짜기로 무학굴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학골은 예순 비구니(禮順比丘尼)가 『춘추자전(春秋左傳)』과 『효경(孝經)』을 간행한 집터에서 약 30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이 골짜기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왕이 된 후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돼지 바위가 있다.

                                                                                                        -의정부 지명유래 55p

 

48. 회룡골(回龍谷)

회룡골은 회룡사 입구의 마을로서 회룡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회룡사(回龍寺)는 1300여년 전 신라 의상(義湘) 스님이 창건하였으며 원명(原名)은 법성사(法性寺)였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 절에서 3년간 무학대사(無學大師)와 함께 경륜을 폈다고 한다. 그 후에 이성계(李成桂)가 이 곳으로 무학스님을 찾아오게 되었는데 임금이 되어서 돌아왔다고 하여 법성사 대신 회룡사로 고쳤다고 한다. 회룡사 정문 입구에서 아래쪽으로 약 10m 정도에 회룡사계곡과 회룡사폭포가 있다.

                                                                                                           의정부 지명유래 57p

 

52. 범굴

범굴은 일명 백인굴 또는 박쥐굴이라고도 한다. 10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굴이라고 하여 백인굴이라고도 하고, 박쥐가 살았다고 하여 박쥐굴로도 불린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말 우왕 1년 봄 이성계가 아직 등극하기 전 무학대사와 함께 이 산에 와서 대업경륜을 위한 기도를 3년이나 올렸다고 한다.

                                                                                                     의정부 지명유래 58~59p

 

58. 전좌(殿座) 마을

전좌마을은 회룡골 입구 마을로서 조선왕조 개국 초 왕자의 난으로 상심한 태조(太祖)가 함흥으로 간 후 돌아오지 않다가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설득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이에 태종이 이곳까지 마중 나와서 부자가 상봉하게 되었는데 그 때 임금이 좌정하였던 자리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일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왕이 된 후 무학대사를 만나러 왔다가 쉬어 간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 전좌마을 옆의 얕은 고개를 설개고개라고 하는데, 일본에 대한 한이 서려서 서럽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의정부 지명유래 60p

 

그럼 의정부 호원동 회룡분지(回龍盆地)는 어떤 기운을 품고 있기에, 이렇게 대단한 두 군주(君主)를 탄생(誕生)시킬 수 있었던 걸까요?

그건 호원동 회룡분지(回龍盆地)의 지기(地氣)가 남다르기 때문이죠.

혹시 명당(明堂)자리라고 들어보셨죠. 명당(明堂) 자리란, 무덤이나 집터 또는 마을의 입지를 정할 때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공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호원동 회룡분지(回龍盆地)가 바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다니는 천하명당 자리인 옥토망월(玉免望月) 자리였던 거죠.

‘옥토끼가 달을 보는 지형’이라는 뜻의 옥토망월(玉免望月) 지형은, 개인의 부족한 부분을 달(月)의 기운이 채워주어 누구든지 하고자 하는 꿈이 있다면 그 꿈을 반드시 이루도록 도와주는 천하(天下) 명당(明堂)자리라는 거 아닙니까.

천하통일(天下統一)을 꿈꿨던 두 사람.

거대 제국(帝國)을 꿈꿨던 두 군주(君主)가 모두 의정부 호원동 옥토망월(玉免望月) 지형 회룡분지(回龍盆地)에서 그 꿈을 이루었다니 참으로 명단 자리가 아닐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호원동 회룡분지가 옥토망월 지형이라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 거냐고요?

아래의 사진을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사실 망월사(望月寺)의 기록이 ‘1350여년전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혜호 스님께서 왕명을 받아 국태민안과 삼국통일을 염원하는 도량으로 흙으로 빚기 시작하였고, 또한 월성(지금의 경주)을 바라면서 신라왕실의 융성을 기원하다해서 망월사로 이름하였다.’라고 뚜렷하게 남아 있어서 그렇지 망월(望月)이라는 말은 그 전에 이미 이곳 지형 때문에 사용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은 곳으로 보여 집니다.

 

 

 

어떠세요. 제 주장이? 위의 2명의 군주는 우리가 역사 시간에 들은 풍월(風月)이 있으니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셨을 겁니다.

그런데 의정부에 역사에는 숨겨진 군주가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바로~. 모수국의 동박 천군(天君)이십니다. 물론 이 분에 대해서는 역사에 정확하게 등장하지도 않고 등장한 적도 없기 때문에 다분히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먼저 말씀드리고 시작해야겠네요.

의정부는 중랑천(샛강, 한내)을 중심으로 동(東)과 서(西)로 나뉘어 발전해 왔습니다. 현재도 두 국회의원이 이 기준을 가지고 갑구(서쪽), 을구(동쪽)로 나눠지는 것처럼 이러한 특징은 의정부 지역의 고대사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의정부 시청 방향의 서쪽은 철기문화를 가진 온조대왕 세력이 기원전 18세기에 유입되어 온조국(溫祚國)을 세우게 되고, 민락 2지구 방향의 동쪽은 온조대왕 세력이 들어오는 18세기 전, 아주 높게는 BC507년 경, 아주 가까운 시기로 잡으면 BC409년 경 유입되어 기존에 자리하고 있던 고조선 세력인 한(韓)족과 섞여 토착화된 청동기 문화의 나라 · 고인돌의 역사를 만든, 마한의 54개국 중 넘버 2인 ‘모수국(牟水國)’이 세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모수국은 갈립산에 옥재동굴에서 나는 청옥을 가지고 지금의 민락천(과거에는 냉천=찬우물=젖물)을 이용하여 중랑천으로 해서 한강으로 해서 중국으로 직접 무역을 하여 제법 짭짤한 경제생활을 영위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왜? 모수국(牟水國)은 온조국(溫祚國)의 자리가 그리 좋다는데 거기로 정하지 않고 지금의 중랑천 동쪽 지역을 잡았을까요?

그 이유는 고인돌로 사용할 돌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지역(귀락마을, 의정부시 자일동 41-6번지)이면서 그 앞에는 넓은 민락 평야(현재 아파트가 어마어마하게 들어서는 민락 2지구.)가 똬악 펼쳐져 있고, 청옥(靑玉)이 나오는 동굴까지 있으니 모수국 도읍지로는 최고의 자리였을 겁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청동기 시대에는 계급의 분화가 불분명했고, 마한(馬韓)이라는 나라는 경기, 충청, 전라 지역에 넓게 흩어져 54개국이 연합체계로 이루어져 있어서, 각 나라마다 알아서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측면이 컸기에 서로 싸우기 보다는 협조하고 상생하는 구조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즉, 누구의 침범이나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는 평화스러운 환경이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적의 침범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방어물을 만들기보다는 자연물을 이용한 방어물 확보 정도가 전부였을 때입니다.

그런 반면에 서쪽의 온조국은 북쪽(만주, 요동, 산동)의 철기문화를 받아들이고 전쟁과 지배, 계급이 뚜렷하게 분화된 사회를 경험한 상태에서 그에 맞는 자리를 잡으려 하다보니까, 자연적 방어물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의도적 방어물을 세우기 좋은 곳을 찾게 되고 거기에 걸맞는 의정부 회룡분지에 자리 잡게 되었던 거죠.

이 특징은 서쪽의 회룡분지와 동쪽의 낙양동 오리골이나 귀락마을을 방문해서 비교해보면 금방 확인이 가능한 사안입니다.

아이고~. 모수국을 이해 시키려다보니 먼 길 좀 돌아오게 되었네요.

그러면 모수국의 임금님을 동박 천군이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상상의 나래를 펼칠 자료가 의정부지명유래 고산동 108p 13번, 14번 줄에 나옵니다.

 

13. 황새바위

황새바위는 1960년대까지 만 해도 황새들이 이 바위 위에서 서식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그 모양도 황새와 같이 생겼다고 한다.

 

14. 아기동박골

아기동박골은 황새바위 아래로, 아기가 나왔다는 아기 동박골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떠세요? 상상의 나래가 활짝 펼쳐지시나요? 아직 느낌이 잘 안 오신다고요?

 

그러시죠. 뭐 그럴 수도 있죠. 거참. 쩝.

그래서 여러분들의 상상력을 충전시켜드릴 MSG를 조금만 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황새의 다른 이름은 황학(黃鶴)입니다. 황학의 다른 이름은 금학(金鶴)입니다.

학에도 서열이 있는데요. 백학(白鶴)이 청학(靑鶴)이 되려면 천년(千年)의 시간이 걸립니다. 청학이 최고의 단계인 금학(金鶴)이 되려면 또 천년(千年)이 걸립니다.

도합 2천년. 그러면 그때 비로소 신선(神仙)들과 함께 다닐 수 있는 학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는 겁니다.

여담이지만 의정부 고산동 바로 옆 동네인 남양주 별내면 청학동에는 백학이 천년동안 수련하여 청학이 되는 동네라면, 의정부 고산동 황새바위는 그 청학들이 천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낄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이지요. 음화화. 듣고 있나? 친구 정일삼.(이거 청학동 친구들이 읽으면 신박사 테러 당할지도. 흑)

그런 곳에 동굴이 있는데, 아이가 스스로 나왔다?

그래서 그 터를 ‘아기동박골’이라고까지 지명으로 남긴다?

의정부 부용산 중턱에 고구려의 고주몽, 신라의 박혁거세와 김알지, 가야의 김수로 왕과 같은 난생설화가 전해내려 오지 말라는 법 있나요?

이 지역이 어떤 자리냐?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황학포란형(黃鶴抱卵形: 학이 알을 품은 형상)’ 자리라니 이 정도면 MSG 상상 두 스푼 들어가는 거죠.

그런데 말입니다.(그것이 말고 싶다의 김상중 버전) 고산동(高山洞) 산57-1번지, 부용산 정상 부근의 산 비탈면에서 다음과 같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 모르셨죠?

단면이 편평 육각형으로 양쪽 날에 연마(硏磨)한 흔적이 남아 있는 '돌살촉'과

황갈색, 회흑색, 회갈색 등의 색을 띠고 있는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었습니다.

'돌살촉'은 신석기부터 초기철기 시대까지 쓰였던 무기의 일종이고 '민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그릇의 유형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신동명 박사 마음대로 앞뒤내용 맞추고 추측해서 모수국의 임금님 이름을 ‘동박(東珀)’ 이라 결정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모수국(牟水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면 그것도 BC507년 경부터 국가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면 임금님이 당연히 있었지 않았겠습꽈!

이렇게 추리 해보니 의정부에는 세 명의 군주가 탄생한 땅이 되어버렸네요.

그런데 말입니다.(그것이 말고 싶다의 김상중 버전) 의정부 동쪽은 명당자리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 혹시 들어 보셨나 모르겠네요. ‘갈용음수형(渴龍飮水形)’이라고?

민락 2지구 아파트 들어서면서 고객 유치를 위해 아파트 회사들이 광고 심하게 때리던데...

바로 부용천(芙蓉川)의 기운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형을 ‘갈용음수형(渴龍飮水形)’ 명당자리라고 하는 겁니다.

‘갈용음수형(渴龍飮水形)’이란? 한강 하구 서해바닷가 쪽에 살던 용이 동쪽으로 여행을 가던 중 삼각산(북한산, 도봉산, 부아악)을 넘다보니 목이 말라 세상을 내려다보니 금빛은빛 반짝이는 아름다운 내(川)가 있어 목을 축이고자 내려와 물을 마시다가 그 내(川)의 모습에 반하여 승천하지 않고 부용천(芙蓉川)이 되었다는 전설을 품은 지형을 말하죠.

와우. 여기도 회룡분지(回龍盆地)와 똑같이 용의 기운이 서린 동네네요. 그러니 특별한 스펙을 가진 모수국 임금 동박(東珀)님 같은 분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죠. 물론 이름의 뜻은 ‘동쪽의 밝은 기운과 옥이 나오는 땅’을 뜻하는 순 우리말로 사용했습니다.

신박신박 신동명 박사님은 이제 작명(作名)도 하고 막 그러시는 거야? 그래도 되는 거야? 그렇습니다. 스토리텔링을 하다보면 별의별 능력 다 발휘해야 하거든요. 아이에게 좋은 이름 필요하신 분은 언제든지 연락하시면 됩니다.

 

박사님. 박사님. 그럼 네 번째 군주도 나올 수 있겠네요? 그렇죠. 네 번째 군주도 반드시 의정부에서 나올 겁니다. 호원동 회룡분지(回龍盆地) 옥토망월(玉免望月)의 기운과 부용산과 부용천으로 형성된 ‘황학포란(黃鶴抱卵)의 기운, 갈용음수(渴龍飮水)의 기운을 흠뻑 누리고 있는 당신이라면 당연히 네 번째의 군주가 되지 않겠어요. 아! 선생님은 아니시라고요? 극구 사양하시겠다고요!

그렇다면 당신의 자녀 중 누군가는 네 번째 군주가 될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아! 그런데 어떤 선지자(先知者)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생각나 독자님에게만 다른 사람 몰래 귀띔해드릴게요.

귀 좀 가까이...

“삼귀(三龜)마을에 가면 거북이 세 마리가 있는데, 이 세 마리를 모두 찾아낸 사람은 반드시 다음의 군주가 될 것이다.”

이러다 민락동 삼귀마을에 있다는 거북이 세 마리 찾으러 오는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거 아냐?

에이. 거기까지는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고, 저는 오늘 너무 많은 천기누설(天機漏洩)을 해서 기력이 급 딸리네요. 기력이 딸릴 땐 부대찌개 앞으로. 제 어머니가 운영하는 경기 제2청사 앞 ‘신가네 부대찌개(의정부시 장곡로 628번길 26)’에서 부대찌개 재료들이 쏟아내는 얼큰한 어머니의 손맛으로 기(氣) 충전 좀 하러 달려갑니데이. 자 그럼 이제 다음 글에서 보입시더~.

 

이문상 기자 jusinkh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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