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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마술사'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나요?
여자보다 더 예쁘다는 '유승호'와 응답하라 1994에서 인기를 끈 ‘고아라’가 주연을 맡은 영화 ‘조선마술사’
이 영화가 의정부 금오동 산45-20(산장 아파트 옆)에 실제 있었던 슬픈 역사를 배경(모티브)으로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으실 겁니다.
청나로 끌려간 비운의 여인,
나라의 힘없음이 만들어낸 희생자,
위기의 조선을 구하고 환향년(還鄕女)이 된 우리의 자화상(自畵像), '의순공주(義順公主)의 이야기'는 다양한 장르에서 다루어졌습니다. 특히 연극계에서는 여러 번 다루어졌죠.
그 대표적인 연극 중 하나가 ‘극단 허리’에서 연출한 ‘환향(還鄕)’입니다.
때는 병자호란(丙子胡亂) 인조임금이 청나라의 침략에 굴복하고 머리를 땅에 3번 부딪쳐 피 흘리며 항복했다는 '삼전도의 치욕' 사건을 지나, 함께 청나라에 8년 간 볼모로 끌려갔던 형 소현세자의 병사로 동생인 봉림대군이 효종대왕이 되어 정사를 보던 1650년(효종 1) 3월의 일입니다.
조선을 삼킨 청나라는 내정간섭을 하기 위해 억지조공을 강요했는데, 그 핑계가 처녀 인피 300장과 남정네 불알 3말을 구해 오라는 것이었죠. 겉으로는 이러한 요구였지만 뒤로는 '조선의 공주'를 시집보내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
이 사건으로 한양의 대궐은 난리가 터졌습니다. 효종도 딸을 숨기고 높은 벼슬아치들도 딸을 숨기느라 안절부절했으니까요.
딸을 숨기면 큰 벌을 내리겠다고 효종이 아무리 호통을 쳐도 왕부터 자기 딸을 숨기는 상황에서 누가 내 딸 여기 있네 하면서 내놓겠습니까?
이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 그 자체였죠.
이때 등장한 사람. 의정부 금오동에 살던 왕족 금림군 이개윤(성종(成宗)의 아들인 익양군(益陽君)이회(李懷)의 후손). 자신의 딸을 내세워 청나라로 갈 것을 자청하니 비로소 조선은 살 길이 열리고, 효종은 기뻐 양녀로 맞으며 이름을 지어주니 '의순공주(義順公主: 의로운 뜻을 따르다.)'라.
그녀의 이름은 이애숙(李愛淑). 당시 나이 16살. 조선을 살리고자 청나라의 섭정(정치의 실세)인 도르곤에게 시집 갈 것을 마다하지 않은 여인.
마침내 1650년 4월 22일, 의순공주는 고국을 떠나 이국만리 청나라로 떠납니다. 이날 효종은 의순공주가 얼마나 고마웠던지 서대문 밖 근교까지 손수 나가 공주를 전송했고, 공조 판서 원두표가 공주를 호위, 시녀 16명과 의녀, 유모, 몸종, 수모(首母)가 그 뒤를 따랐더랬죠.
5월21일, 의순공주는 6만의 수행원을 이끌고 연산(連山: 요령성 葫芦島市)까지 마중 나온 39살의 도르곤을 만나 혼인 의식과 초야를 치뤘고, 도르곤은 그녀를 대복진(大福晉: 정실부인 중 으뜸)으로 대우하죠. 당시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무려 23세.
실학자 성해응이 쓴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서는 도르곤이 의순공주를 보고 매우 기뻐하여 백송골(白松鶻: 우리나라에 산다고 알려진 흰 색깔의 매)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보면 부부의 금실(琴瑟)이 매우 좋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일이란 말인가?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도르곤이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니 반대세력들은 도르곤의 집에서 황포(黃袍: 황제의 옷)가 나왔다며 반역의 혐의를 씌우고 그의 재산을 강제로 나누매, 의순공주는 그들의 풍습에 따라 다른 황족 ‘박락(博洛, 보로. 1613~1652, 누루하치의 손자)’이라는 자에게 넘겨지고 말았지요. 그런데 이 '박락' 조차 1년을 넘기지 못 하고 죽는 사태가 벌어지고 마니 이 어인 일이란 말입니까? 그려.
어린 나이에 날벼락 같은 일들이 겹치고 또 겹치는 불운을 겪는 의순공주.
뒷방 생활, 순탄치 않은 청나라의 생활 속에 간신히 목숨만 유지하던 의순공주.
효종 6년, 이개윤이 조선의 사신의 자격으로 북경을 방문. 1656년(효종 7) 청나라 황제에게 글을 올려 의순공주를 조선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니 그해 4월 26일 그녀가 마침내 의정부 금오동에 돌아온 나이는 22살.
'환향년(還鄕女)'
청나라에 끌려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 '환향년(還鄕女)’
의순공주 또한 이러한 손가락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니 그 한이 뼈에 사뭇쳤으리.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던가? 사헌부(司憲府)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이개윤을 삭탈관작(削奪官爵)하라 게거품을 물어대고 효종이 죽으며 현종에게 부탁한 약조 ‘배를 굶게는 하지 말라.’끝내 지켜지지 않네. ‘의순공주’가 아니라 ‘이개윤의 딸’이라 호칭마저 바꾸어 부르니 머리 풀어 헤쳐 통곡하고도 남을 경험을 조선 땅에 와서도 치뤄야 했던 의순공주.
왕 조차 할 수 없었던 조선이라는 나라를 구하는 일, 그 큰일을 해냈으나 주위로부터 인정 한 번 제대로 받지 못 하고 6년 반 만에 생을 마감하니 1662년(현종 3) 8월 18일 의순공주 29살이 되던 해라. 너무나도 서러운 삶을 산 의순공주를 곁에서 바라본 공주의 어머니가 이 한을 풀어주기 위해 사당 건립을 요청하여 마을에 사당이 건립하니 그 이름을 ‘정주당(靜州堂)’이라 부르게 되었지요.
그러나 곁에서 의순공주의 고통을 지켜본 백성들의 기억도 사료 남은 위의 정사(正史)의 기록과 같았을까? 민중들이 바라본 의순공주의 사건은 사뭇 달랐던 듯싶습니다.
‘족두리 묘’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족두리 묘’는 ‘의순공주 묘’의 다른 이름입니다.
백성들이 부르는 의순공주의 무덤 ‘족두리 묘’였던 겁니다.
‘족두리 묘’와 관련한 야사(野史)는 다음과 같습니다.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떠나던 날, 그녀가 살던 마을 전체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의순공주는 평안도 정주(定州)에 도달하자 청천강(또는 압록강이라고 전함)을 건너기 전 고향땅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다가 강물로 뛰어내려 숨을 거두게 되는데, 사람들이 급하게 뛰어들었으나 끝내는 시신을 찾지 못 하고 대신 머리에 얹었던 족두리만 건져내어 의순공주 무덤을 만들 때 그 혼을 달래고자 족두리를 시신 대신 관에 넣어 모시는 ‘족두리 무덤’이 되었더라는 이야기.
얼마나 억울했을까?
꽃 같은 나이에 남의 나라로 끌려간다니?
그것도 공주를 대신하여 대리결혼을 하러 간다니?
아무리 아버지의 설득이지만 16세 꽃다운 나이를 오랑캐에게 바칠 수는 없는 일.
한 많은 생애를 강물에 던지니 다시는 이런 세상 쳐다보기도 싫어 강물 속으로 깊이깊이 숨을 수밖에.
사람들이 시체를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고 족두리만 떠올라 그것을 건져 그 혼을 달래려 의정부 금오동으로 모시니 그게 '족두리 무덤'이 되었다는 이 설화가 우리 백성들의 진짜 마음이었던 거죠.
그래서 금오동 그 무덤에 심어진 소나무들은 그 의순공주의 주검이 있는 북쪽 정주(定州)를 향해 가지를 뻗는다는 이야기.
의순공주가 죽은 이후 마을에서는 나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의순공주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정주당(靜州堂)이라는 사당을 세우고 매년 3월에 제를 지내니 나쁜 일이 사라지더라는 이야기는 의순공주의 사건을 바라보는 민중들의 안타까운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