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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

대륙 신라와 당나라 기행문.일본 엔닌스님의『입당구법순례행기』 2

(1편에서 이어집니다)

 

 

 

22. 7월1일 장안으로 출발

오대산에서 장안까지는 서남쪽으로 2천리(800km) 길을 가야 한다. 태원, 유주, 정주, 거쳐 서안(장안)에 이른다. 좌주인 법견(法堅, 法賢)과 현량(玄亮) 스님, 원주승 광초(廣初) 등 절 안 스님들이 모두 나와 삼문(三門) 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눈물을 닦으며 서로 손을 잡고 헤어졌다.

가는 길에 오대산 남대에 들렀다. 오대산을 청량산이라고도 하여, 최초의 절이 청량사(淸凉寺)인데, 들르려 했지만 도달하지 못했다.

 



다섯 봉우리의 땅 500리(200km) 밖은 사면이 모두 높은 봉우리가 줄을 지어 펼쳐져 오대(五臺)를 둘러싸고 있어 1천리(400km)쯤 된다. 칼날 같은 봉우리가 줄지어 겹겹이 담장같이 둘러싼 꼴이다. 이 산에 들어오는 사람은 자연히 평등의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승려와 속인, 남자와 여자, 대인과 소인, 존귀하고 천한 사람, 어른과 아이로 나눠 보지 않고 그 곳에서는 모두 문수보살을 생각하게 된다.

7월3일 대臺에서 내려가다가 절(七佛敎誡院) 하나를 발견했다. 일본 영선 스님(靈仙和尙)이 여기 살다가 죽었는데, 발해 정소(貞素) 스님이 곡(哭)하는 시를 현판에 적어놓았더라.

7월6일 오대(五臺)의 남쪽 산문을 지나 대주(代州 오대현)에 도착하였다. 서남쪽 30리(12km)를 가서 호타하(胡陁河)를 건넜다.

7월8일 서남쪽 30리(12km)를 가서 산서성 흔주(忻州 정양현)에 도착했다. 태원 바로 위다. 흔주 정양현은 수나라 정양이었던 곳이자, 훗날 고려 땅 정양현이기도 하다.

 

 


7월13일 '태원(太原府)'에 도착했다. 여기가 당시 북경! 이곳을 '하동(河東道 황하동쪽)'이라 한다. 서경에서 2천리(800km)이다.

 



7월18일 남천축국의 삼장 법달(法達) 곁에서 오대산의 여러 영험한 현상을 전하는 비지(碑誌)를 베껴 적었다. 7월26일 태원성 서문밖 진산(晋山)을 들렀는데, 석탄이 많이 나는데다 화력이 매우 좋아서 사람들이 채취해 가서 요리에 쓴다고 한다.


8월1일 서남쪽 분주(汾州)에 도착했다. 분수(汾水)가 흐르는데, 티벳으로부터 흐르는 강이다.

23. 장안에서 꽤 오래 있음

8월22일 장안성 동쪽 통화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이튿날 순원(巡院)의 관리(知巡押衙, 監察侍御史)에게 낼 거주 관련 서류를 준비하게 되는데, 관리 이름이 성은 조씨(趙氏), 이름은 연(鍊)이었다.

8월24일 "일본 스님 원인, 제자승 유정과 유효, 행자 정웅만 등은 재작년 4월 배를 타고 출발해 7월2일 양주 해릉현에 도착했으며, 8월 양주 개원사에 도착하여 겨울을 보냈습니다. 작년 2월 초주를 거쳐, 7월 등주 문등현 적산원(적산법화원)에 머물며 또다시 겨울 한철을 지냈습니다. 올2월 등주를 떠나 3월 청주에 도착했고, 5월1일부터 오대산 순례를 했습니다. 7월1일 오대산을 출발해 23일에 장안성에 도착했습니다. 성 안의 절에 머물까 하니, 허락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의 소장을 바쳐 올렸다.

10년 있었다. 엔닌은 50살이 되도록 장안에 머물렀다.

24. 842년 위구르(회골廻鶻) 침략

841년 당왕 이염(李瀍 당무종 840~846)이 태청궁(太淸宮)에 들르자, 엔닌 등 스님들은 재를 베풀어 주었다. 왕은 남교단(南郊壇)에서 20만 군을 거느리고 제사를 지냈다.

842년 태원군 3천명이 위구르 북경에 있다가 난리를 치니까, 당나라에서 다 잡아들여서 죽였다.

위구르(회골廻鶻) 군이 당나라 국경을 넘어 침략해 오자, 병마를 뽑아 보내 성 안의 위구르(회골廻鶻) 사람 수백 명을 모두 목 베어 죽였다. 여러 주와 부에서도 거주 중이던 위구르(회골廻鶻)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였다. 피의 군주!

25. 843년 1월, 외국 스님들 소환

남천축 스님 5명, 북천축 스님 1명,사자국(師子國) 스님 1명, 엔님스님 일행이 묵었던 자성사 일본 스님 3명, 여러 절의 신라 스님들, 구자국(龜玆國) 스님 등 모두 21명이 함께 소환에 응했는데, 관군용사(구사량仇士良)는 이들을 어쩌지는 않고, 위로한 후 돌려보냈다.

4월 조칙이 내려와 위구르교에서 받드는 마니교 포교자들(마니사摩尼師)을 잡아 죽였다. 5월 공덕사가 첩문을 내려, 여러 절에 있는 외국승이 온 사유를 조사했다.

26. 9월 하북도 노부절도사(路府節度使) 유종간(劉宗簡) 반란

노부 관료(압아 강손畺孫)가 머리를 깎고 절에 숨어들었다 하여 절의 스님들 중 내력이 확실하지 않은 자는 모두 체포하였다. 경조부(京兆府)는 스님 300여 명을 타살하였다.

그때까지 계속되던 위구르와의 전쟁에서 위구르군(迴鶻國군대) 크게 패하였으므로, 여러 주와 부의 병사들은 모두 본도로 돌아갔다.

27. 844년 반란 제압

3월 현산동성 장치현인 '노부(潞府)'의 관료(압아)이자 반역자(강손畺孫)가 숨어있을까 해서 대대적인 불교 탄압에 들어간다. 공양 전면 금지를 선포하면서 대주(代州)의 오대산, 사주(泗州)의 보광왕사(普光王寺), 종남산의 오대(五臺) 봉상부(鳳翔府)의 법문사(法門寺) 등에서 승니가 한 푼이라도 받는 자가 있으면 등에 매 20대를 친다고 엄포를 놓았다. 여러 도의 주·현에서 공양물 나르다 발각되면 체포하여 똑같이 20대를 때리라 하였다.

백성 다스리는 데에 어차피 종교는 필요한 법, 불교 대신 도교를 숭상하기로 한다. 왕은 도사 81명을 불러들이고 대궐에 구천도량(九天道場)을 짓게 한다. 천존(元始天尊), 대라천(大羅天)에게 제사지냈다.

각 절의 경전을 불사르게 하고 불상을 부수어 버리고 많은 스님들을 쫒아내어 각기 본사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고는 도량 안에 천존상(天尊像)과 노군상(老君像)을 안치하고 도사로 하여금 도교 경전을 독경하게 하고 도술을 수련하게 했다.

7월, 왕은 200칸보다 작은 절은 모두 헐어버리게 하니, 장안성 내 300개소를 헐게 된다. 지방의 주(州)에 있는 큰 절에 필적할 만한 것임에도 조칙에 따라 모두 다 없애버렸다. 여러 도에 있는 전국의 불당·사원 등을 파괴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8월 3년간 위구르(廻鶻) 경계에서 집에도 못 가고 지켜야 했던 3천명의 태원(太原府)의 병사들은 불만이 쌓여있었다. 그런데 절도사가 노부(路府)를 공격하겠다고 하니, 더이상 못 참고 반란을 일으키더니 성안에서 서로 싸웠다. 절도사가 이를 왕에게 일러바쳤다. “회골을 깨뜨린 공이 있으니 죽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라는 의견을 묵살하고, 왕은 "모두 목을 베어 죽이라 Kill them all!" 하였다. 노부로부터 붙잡혀 온 군사들이 동시(東市)의 북쪽 거리 둔덕에서 참수되었다.

결국 노부(路府) 반란군이 졌고, 노부 관료(押衙)와 대장(大將)은 경성으로 압송되어, 6, 7차례나 베어죽임 당했다. 반란 우두머리 유종간의 머리를 창 끝에 꽂고 동서 양 시가(市街)를 돌고 대궐로 들어갔다. 노부 유가(劉家)의 엄청난 재산·전물·보배·가구 등은 7, 8대의 금수레에 실려 수차례에 거쳐 성 안 황실 창고로 보내졌다.

도사 조귀진(趙歸眞)이 “서쪽 오랑캐 땅에서 태어난 부처가 말하는 '불생(不生)'이란 곧 '죽음'입니다. 사람을 교화하여 열반에 들어가게 하는데, 열반이 죽음입니다" 말한다.

당왕이 ‘불교는 죽음의 종교’라 하여 불교를 버린다 한다. 10월부터 절 안의 동불 철불 다 부수고 불교 탄압이 본격화된다. 네 절은 절을 파괴하지 않았다.

28. 845년 극심해진 무종의 불교 탄압=회창폐불(會昌廢佛, 841~846)

불교 교단이 번성하면서 요역을 면제받은 승니와 사찰 소유의 땅이 늘었고, 나라의 재정이 궁핍해지면서 불교 교단의 정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다가 무종이 도교를 믿으면서 불교 탄압 정책은 그 도를 더해갔다. 탄압이 극에 달하였던 845년에는 4,600개의 큰 절과 난야와 같은 작은 절 4만여 개가 파괴되었다. 환속된 승니 수는 26만명이나 되었다.

왕난(王難)을 만나 멀리 바다 건너 일본에서 온 엔닌 일행 역시 견디다 못해, 집에 가기로 한다.

845년 5월13일 절의 스님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마치고 곧 속인의 옷을 입었다. 이틀뒤 경조부에서 사람을 보내 전송해주었다.

5월22일 장안의 ;목'에 해당하는 동관(潼關)을 통과했다. 위남(渭南縣), 화음(花陰縣), 영녕(永寧縣)도 무사 통과했다.

6월9일 정주(鄭州)에 도착하여 지인들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 6월13일 변주(汴州)에 도착했고, 6월22일 사주(泗州)에 도착했으며, 이튿날 회수(淮水)를 건넜다. 동쪽으로 200리(80km) 가면 초주, 회하(淮河) 하류에 있는 도시로 회수(淮水)와 이어지는 요지이다.

 



해주(海州刺史)에서 태주 도지사(台州長史)로 강등된 지인 배사인(裴舍人)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 "장경사·청룡사·안국사의 세 절은 모두 궁의 정원이 되었다"는 비통한 소식을 전했다.

6월28일 양주에 도착했다. 훗날 최영 전투지이기도 한 고우(高郵縣)를 거쳐 7월3일 초주에 도착했다. 신라방(新羅坊)으로 들어가 일본어 통역을 해주는 신라사람 유신언을 만났다. 유신언이 뇌물도 쓰고 백방으로 알아봤으나, 결국은 "등주로 가서 배타고 본국으로 가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틀만 머물러도 조칙 위반죄가 적용된다고 한다. 등주는 초주로부터 동쪽 1100리(440km)다.

초주 관료(同十將) 설전(薛詮)이 비단 9필, 신라 칼 10자루를 보시한다.

29. 등주 적산법화원에서 머물도록 배려받음

 

 



회남도(淮南道)의 양주와 초주의 주와 현 사람들은 인심이 간악하여 믿기가 매우 어렵다. 3천리(1200km) 떨어진 강남도의 상주(常州)에 일본 배 2척이 와 있다는 말을 듣고 7월8일 초주를 출발한다. 배를 타고 회하로 들어가 이튿날 사주(泗州) 연수현(漣水縣)에 이른다.

엔닌 스님이 등주 적산원에 있을 적에 청해진병마사(淸海鎭兵馬使)였던 최훈(崔暈十二郞)을 만났다. 최훈이 백방으로 힘쓴 덕에 7월13일 해주(海州)로 향해 출발할 수 있게 됐다. 이틀뒤 해주에 도착했으나, 배편 귀국을 허락받지 못해 걸어서 북쪽으로 7월18일 해주 관할 회인현(懷仁縣)에 이르렀다. 거기서 고생 끝에 7월26일 산동성 제성현(諸城縣)의 치소인 밀주에 다다랐다.

8월10일 래주(萊州), 8월16일 신라 동북쪽 끝 등주에 도착했다. 여기에서야 드디어 위로 북해(北海)가 보였다.

산을 넘고 들을 건너 8월24일 문등현(文登縣)에 이르렀다. 신라 안의 외국인 거류민들을 보살피는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에 들러 먹을 것을 얻어먹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귀국할 배편을 구할 수 없을까 빌어, 동남쪽 70리(28km) 문등현 관할의 청녕향(靑寧鄕)으로 가 보라는 설명을 들었다.

8월27일 지인인 신라 관리 장영(張詠. 大使, 勅平盧軍節度同十將/登州諸軍事押衙)을 만나니,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다. 9월22일 장영(장대사)의 집안사람인 고산(高山)이 배편으로 초주로 간다 하니, 거기서 불경을 받아오도록 부탁한다. 그리고 스님으로 하여금 등주 적산법화원에서 머물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신라 스님으로 환속한 분인 이신혜(李信惠)가 예전에 일본에서 8년 살다 와서 일본말을 잘 했다. 장영(장대사)이 그로 하여금 엔닌 스님 일행을 잘 보살피게 부탁했다.

30. 11월3일 장영(장대사)가 적산원 찾아옴

7월 이래로 티벳(토번土蕃) 침공, 위구르(회골廻鶻國) 침공으로 3, 4년에 걸쳐 불교탄압(승니 규제+환속, 불당寺舍파괴+노비몰수)는 끝났다. 황하 이북의 진주(鎭州), 유주(幽州), 위주(魏州), 노주(潞州) 등 4곳에서는 불교탄압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스님에게 전해 주었다.

31. 846년 이염(李瀍) 사망

3월23일 흉폭하게 불교탄압을 하던 당왕 이염(李瀍 무종 840~846)이 죽었다는 소식을 4월15일 전해들었다. 몸이 뭉개지고 흐트러져 죽었다고 한다.

4월27일 신라 사람 왕종(王宗)이 일본 성해 스님(性海法師)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5월1일 양주로 돌아간다 하니 답신 편지를 전해달라 부탁했다.

새 왕 이침(李忱 선종 846~859)는 주마다 절 2개까지는 지을 수 있게 하고, 매 절마다 스님 50명 둘 수 있게 했다. 당왕 이염(李瀍)이 난리를 치다 죽고 새 왕 이침이 들어서는 동안 천자국 신라는 46대 문성대왕(김경응慶膺 839~857)이 다스리고 있었다. 장보고가 옹립시켰던 황제 신무왕(김우징祐徵)의 아들!

 

 


32. 847년 귀국

1) 등주~적산포

장영(張詠 장대사)이 일본으로 갈 배를 완성시켰다. 윤3월12일 장대사의 배웅을 받으며 남쪽으로 길을 떠나, 5일뒤 밀주 제성(諸城縣)의 항구에서 비단5필을 삯으로 주고 신라사람의 배를 탔다.

배를 타고 표류도 하고 고생하다가 5월23일 동해산(東海山)에 도착하고 이튿날 회수(淮水) 앞바다에 이르렀다. 6월5일 초주 도착!

6월18일 초주 신라방 왕가창(王可昌)의 배를 타고 등주 도착하여 장영(張詠 장대사)을 재회하고 선물도 받았다.

2) 적산포~홍려관 (대륙의 신라 & 탐라)

9월2일 적산포(赤山浦)에서 배를 타고 해안을 타고 가면서 신라의 산들을 보았다.

9월4일 저 해안 너머, 옛 백제땅이던 동평호 주변 웅주(熊州) 쪽이라는 설명을 듣는다. 무주(武州) 고이도(高移島)에 정박했는데, 서북 100리(40km) 가면 산동반도의 흑산(黑山)이라 한다. 백제의 셋째 왕자가 도망해 들어와 피난한 땅인데, 지금은 3~400가구가 산다고 한다. 의자대왕의 태자 효(孝)와 다른 아들들 태(泰), 융(隆), 풍(豊) 등의 이름이 전해지는데, 이들 말고 다른 왕자일 듯싶다.

9월6일 무주 남쪽 황모도(黃茅嶋=구초도丘草嶋)의 항구(泥浦)에 정박했다. 고이도에서 바람 좋은 날 배로 하루에 닿는 거리인데, 신라 재상(宰相)이 말을 방목하는 곳이다.

9월8일 구초도 항구를 빠져나와 안도(雁嶋)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 이곳은 신라의 남쪽 땅으로 황실에서 말을 방목해 기르는 산이다. 황룡사의 장전이 있는 곳이라 한다. 서남쪽으로 탐라도(耽羅嶋)가 보인다.

9월15일 귤포(橘浦)에 도착했다. 3일뒤 9월18일 홍려관(鴻臚館)에 정박했다.

3) 9/18~10/6, 2주 걸려 일본 도착

10월6일 배에 있는 44명 겨울옷을 지급받았다. 10월19일 "44명에게 보수를 지급케 하라. 원인 등 5명은 수도에 오게 하라"는 태정관의 문서가 도착했다.

신라와 일본이 너무 멀다. 우리가 배우는 반도사관과는 다른 영토 인식이다.

갈 때도 2주, 올 때도 2주 걸렸는데, 산동반도 등주에서 내려와 황해 건너야 하는데 2주만에 큐슈 갈 수 있나, 생각해볼 문제다. 일본 스님이 귀국한 곳은 현 일본열도가 맞긴 한가?

 

 



33. 총포 전쟁 vs 의식 전쟁

역사는 '의식'의 전쟁으로 실제 전쟁이 벌어졌을 때,

명분을 갖고 전쟁에 임하게 하는 '전쟁 준비' 개념이다.

따라서 어찌보면 실제전쟁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역사의식(역사영토 의식)'이다.

현재 우리는 일제 총독부 관제사관인 '반도사관'만을 유일하고 정통인 신앙이자 도그마로 받아들여서 북경 쪽으로 1cm만 나가려 해도 '유사역사학' 비난에 시달리고 역사로 밥벌이가 평생 끊기는 일을 겪게 된다. 어떤 역사학자도 그걸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면 석사, 박사 5년 이상씩 하면서 수천만원 돈을 들였으니까, 그걸로 본전 이상은 뽑아먹어야 하고, 역사계에서 한직이라고 붙들고 가족들 먹여살리려면 절대 '반도사관'의 도그마 바깥으로 한발짝도 나가면 안 되는 것이다.

”너희는 역사 없는 비루한 민족이다. 너네 땅도 우리 지방정권이었으니 유사시(전쟁 발발시) 다 내놔라“ 이런다. 지금 반도사관 의식상태로는 "그럴까? 우리가 지방정권이었던 거 맞잖아? 평양이 안동도호부, 공주가 웅진도호부, 신라가 계림도호부였잖아? 까짓거 그냥 한반도 다 줘도 되겠네" 이럴 수 있다. 매국노 민족반역자들이 대대손손 부와 권력을 쥐고 떵떵거려온 실경험 또한 유사시 온민중에게 "역사든 땅이든 뭐든 다 내주자" 이렇게 만들 수 있다.

No, no... 절대로 안 되지. 거꾸로 우리가 그들에게 “너네가 깔고 앉은 땅, 다 우리 삼국, 고리 선조들이 누비던 땅이다” 말해줘야!

<고려사>에 보면 기마병이 무지하게 많이 나온다. 기병이 거의 없어진 나라 조선.. 조선초는 만주까지 우리 땅이라 말이 그래도 좀 있었는데, 성종 이후로는 거의 말이 없다. 산지7할인 땅에서 무슨 말을 키우나? 고려 때의 우리 본토였던 대륙동부를 이성계-이방원 부자가 주원장-주체 부자에게 내줘버린 탓에 자랑스럽던 수천년 우리 동이민족 천자국 역사무대는 그 '진실(역사영토의 진실)'을 까맣게 잃어버렸다.

형제민족 여진족이 청을 세우면서 북간도 제외한 하얼빈 등 만주땅까지 갈려나가고, 일제 때에는 심지어 "너네 47명 단군의 단군조선 역사는 이제부터 '신화(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바꾼다. 찬란했던 고려 역사영토는 한반도 안짝으로 왜곡조작한다. 이렇게 우리가 사기쳐 준 역사, 역사영토로 배워라" 이렇게 만들고, 해방후 이걸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더더욱 고착시켰다. 해방후 독립운동세력, 민족역사운동 세력이 모조리 좌파로 몰려 백만학살 개죽음당하고 오직 기존 친일매국 반역자집단만이 새 주인 미국으로 옮겨타 빨면서 신기득권으로 우뚝 서서 일제때 만들어준 '개코딱지 역사관'만 유일 정통 사관으로 남겨놓은 탓이다.

한반도는 수백년간 기마전, 해전(수전) 하며 싸울 만한 곳이 아니다. 삼국시대 때 한수(한강)는 황하, 황하 지류였다. 황하 동평호 근처 2백개 성을 본거지로 7백년 대제국으로 강성했던 게 백제이고, 백제의 남쪽에 장시성과 주강을 주무대로 하는 왜, 백제 동남쪽에 양자강 안휘성을 수도로 하는 신라가 있었다.

고려 우왕 때 한성을 새로 짓는다. 공양왕 때까지도 북경 주변 치수를 다스렸다. 이성계 때 천자국 지위를 내주고 저 멀리 현재 서울에 한성을 쌓는 등 병신짓 하다가, 본인의 고향인 하얼빈(근처 쌍성=화령) 인근까지 땅욕심을 내는 주원장과 진검승부를 볼 생각으로 정도전과 함께 요동(태행산맥 동쪽) 정벌을 계획하지만, 주체(훗날 영락제)와 친했던 아들 이방원이 정도전 등 요동정벌론자들을 제거하고 현재 서울 한성을 수도로 고정시키고 반도산골짝 내륙안으로 주저앉으면서 북경~남경에 이르는 대륙동부 동이민족 주무대는 영원히 내어준 셈이 되고 말았다.

6백년전까지 수천년간 우리땅이었던 대륙동부 알토란 땅.. 그렇지만 14억 중공과 전쟁이라도 벌여서 땅을 찾겠다 우긴다면 현 이스라엘 같은 깡패국가(5천만 인구의 당랑거철 신세)가 되겠다는 것으로 Bullshit 개헛소리다. 다만 6백년전까지의 우리의 진짜 역사영토는 진실 그대로 훤하게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중국공산당, 너네 탐욕으로 역사 바꾸고 남의 땅 먹으려고 하지 마라..
역사조작의 원흉 일본극우와 한국토왜, 너네 탐욕으로 왜곡조작된 역사에 5천만 민중이 본질과 정체성을 잃고 개코딱지만한 영토에서 너희가 쳐놓은 이간계 안에 헛돌며 병신삽질을 하고 있는 중이다. 행복하냐? 기뻐? 째져?

 

 


농업혁명 이후로는 '땅(땅위에 사는 인구)'이 국력의 척도였고, 산업혁명 이후로는 '자원'이 국력의 척도가 되었으나, 현재 AI디지털혁명 이후로는 땅이나 자원보다 AI기술, 디지털영토, 그 나라의 매력도가 국력의 척도가 될 것이다.

헛된 탐욕으로 '거짓의 역사' 안에서 헤매지 말고, 한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동이민족 실제 역사'의 본령을 깨닫고 되찾아 바로세우자. 지구 모든 사람이 형제이다. 다 함께 손맞잡고 대동세상으로 나아가자.

 

 

 

글 : 고려, 삼국 역사복원 협회,  고려사 복원 학회. 이사  Chris Kim

공저 : <책보고 99개 한국사 강의 요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