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으로 둔갑된 고구려 위축사
위나라 관구검, 고구려를 함락시켰나?

가슴 뛰는 우리나라의 영어 국명 고구려, 고려, Korea는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해석되고 있다.
중국은 열성을 다해 ‘과거부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라고 전 세계에 홍보하고 있다.
우리 한국 교과서의 고구려 영토 해석도 중국의 주장과 같다.
고구려는 만주 산골만 점유했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는 3세기에 삼국지의 위나라 장수 관구검에게 수도가 함락되어
멸망 직전까지 갔다고 가르친다.
그 후 당태종의 공격으로 고구려는 고전했다고 하며, 마침내 당나라에게 정복되었다고 배웠다.
발해 역시 건국했지만, 말갈인 위주로 당나라에 충성한 지방정권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민족의 역사와 혼을 갉아먹는 잘못된 해석을 우리는 어떻게 반론할 수 있을까?

1. 실제 한국의 역사는?
실제 한국사의 시작은 단군직을 맡은 왕검이 BC 2333년 고조선을 건국하고 나라는 47대를 유지했으며, 북부여와 고구려로 나뉘어 기원후 49년에는 고구려가 북평,어양,상곡,태원을 먼저 점령했으며 184년에 고구려 고국천왕이 좌원(坐原) 한나라를 괴멸시켜 그해부터 시작된 황건적의 난으로 220년에 한나라는 멸망했고, 수나라와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상처를 입고 패하였으며, 전쟁의 신, 김유신을 필두로 신라가 통일하고, 왕건의 고려가 그 영토를 그대로 이어받아 점유했다.
전 세계를 지배했던 몽고는 고려의 영토 넓음과 강함으로 유일하게 사돈의 국가로 맞이한 나라였으며, 조선 건국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축소되어 유지되다가,
임진왜란 후 만주의 여진족이 청나라로 건국하여 중원을 다스리며 역사는 이어온다.
2. 교과서가 강조하는 패배주의 관점의 우리 역사
그러나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한국의 역사는
점령과 피해의 역사로 둔갑되어 식민지인들의 지배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니,
교과서의 시작부터 고조선은 한나라가 4개의 마을, 즉 한4군을 세워 통치했고,
연나라의 위만이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하며,
고구려는 위나라의 관구검에게 수도가 불탔고 당나라는 고구려를 점령하고,
거란,여진,몽고에게 차례로 고려는 조공을 했다며
한국사를 지배와 피해의 역사로 강조하며 가르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발목 잡을 수 있는 명분이 되며, 세계로 뻗어나감을 방해하는 민족혼을 짓누르는 교육이다.

3. 고구려와 위나라 전쟁 시작
고구려 중기, 대륙의 중원에 <삼국지연의>로 알려진 유비관우장비, 조조, 손권의 위.촉.오 삼국지의 나라들이 약 50년 정도 존속하다 멸망한다. <삼국사기>에도 237년 오나라가 외교 사신을 고구려에 보냈으나, 죽여서 이미 동맹이었던 위나라에 전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와 위나라는 238년 한때 동맹으로 산서성에서 건국한 연나라의 공손연을 토벌했다.
그 후 242년 고구려가 안평의 서쪽인 서안평을 침략하자
246년 위나라는 역습하며 고구려의 전방인 환도성을 점령한다.
이때가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즉. 동쪽의 강으로 이동한 시점이다.

4. 관구검인가 무구검인가? 무의 오기.
위나라의 수도는 허창, 낙양으로 조조가 다스리던 국가다.
조방이 다스리고 있을 때, 관구검이란 장수가 고구려의 환도성을 침략하여 함락시키는데,
관씨는 중국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무씨만 잔뜩 존재한다.
관(毌)씨와 무(毋)씨는 충분히 잘못 기록될 수 있으며, 역사 기록에 실제 그런 오기 사례는 무수히 많다. 무씨는 현재 섬서,산서성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가는 오래된 성씨다.
누가 제일 먼저 관구검으로 읽어서 전파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이제부터 틀린 점을 바로잡고 무구검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5. 위나라 관구검 기공 비석은 조작되었나?
북한 압록강 바로 북쪽 중국 땅, 집안(集安)에는 광개토대왕 비석이 있다.
그곳에서 1906년 일본이 러일전투에서 승리한 후, 위나라의 관구검의 비석이 발견되었다며 알려준 비석이 바로 ‘관구검기공비’다. 내용을 보면 허탈하기 그지없다.
부서진 조그만 비석에는 전혀 해당 연대나, 관구검의 어떠한 글자도 없다.
자의적으로 관구검 비석이라고 주장되어 고구려 영토를 축소 해석하는 데 활용되었다.
위나라 글자만 있다.
어디서 주워 왔는지, 일본인이 다른 유물을 보고 글씨를 적어놨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그 어떤 유물에도
관구검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물은 늘 자의적 추정 해석의 결과물이다.

6. 고구려의 수도. 함락 기록의 현장
고구려는 평양, 한성, 국내성 3개의 수도가 존재했다고 <주서>,<신당서>에 기록된다.
<삼국사기>에도 안시성이 환도성이며, 동황성, 장안성도 존재하였다고 기록된다.
209년 고구려 산상왕이 북방의 산악 지역을 활용하여 동그란 지형에 쌓은 수도로 활용한 성이 환도성으로, 가장 최전방에 있던 이 성은 위나라가 잠시 역공하여 불태우고 도망간 고구려의 왕성이다.
246년 <삼국사기>에는 유주(태원)에서 진격한 위나라를 고구려는 2만 군사로 막은 후 철갑 기마부대 5천 명의 군사를 내세워 추격 공격하다가 역습당했다고 기록된다.
그리고 환도성이 함락되었다. 위나라는 그 후 265년, 즉 20년 후 바로 멸망한다.


7. 당시의 시대 상황
207년 조조의 위나라는 이미 산서성 태원의 유성(柳城)에서 오환(烏桓)족을 공격했고,
백제와 사돈 관계였던 산서성 태원에 발원한 공손 씨가 다시 연나라를 건국하자
이제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238년 함께 연나라 토벌에 성공한다.
이에 기세를 이어 고구려는 242년 서안평을 차지했고, 신라의 북쪽 영토마저 점령했다.
위나라는 관구검을 통해 고구려의 북방 환도성을 함락하며 복수에 불을 지폈다.
고구려의 동천왕은 남옥저로 피난을 가게 되고, 충신인 유유와 밀우 덕에 위나라의 공격을 방어한다.
247년 남쪽인 평양으로 천도하게 되고, 신라와의 전쟁을 피하려고 화친을 맺는다.
이후 342년 고국원왕 때 다시 환도성으로 천도하나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전)연나라의 모용황에게 도난을 당하여 동황성으로 수도를 이동한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공격하며 고국원왕마저 죽인다.
이에 분노한 고구려 장수왕이 후에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며 이를 복수한다.

8. 마치며
내용도 없고 근거 없는 관구검의 비석에 속았다.
관씨가 아니고 무씨 집성촌만이 가득하다.
존속기간은 짧고 금방 망한 위나라, 연나라가 그리 대단했을까?
고구려의 수많은 수도 중 하나인 환도성의 함락이 대단한 위험이 되었을까?
그에 비해 배우지 않았던 진정한 기마민족이었던 고구려.
말까지 철갑으로 온통 방어하여 달리던 철갑 기마병 5천 군사.
한반도와 만주 산골에서 말 5천 마리와 철갑을 제조할 수 있나? 말이 달릴 곳은 있었을까?
고구려의 중심 수도는 베이징이다. 중국이 그토록,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지방 속국이라 사활을 걸고 외치는 이유. 한국은 예전부터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수도가 우리 역사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원문과 지형지도로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시대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현재의 교과서 영토 해석을 벗어나
다각도로 여러 자료를 교차검증하여 분석해보자.
뺏을 것인가? 빼앗길 것인가?
동아시아 역사를 명분으로
소멸당할 것인가? 번영할 것인가?

글 : 고려사 복원 학회장 / 고려,삼국 역사복원 협회장. 책보고
왜곡된 한국 고대,중세사 복원의 국민 대운동.
고려 삼국 역사복원 협회 가입, 동참 링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