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을 휘어잡은 고구려 연개소문, 당태종을 떨게하다 1

  • 등록 2026.04.20 18:4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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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淵蓋蘇文 603~657) vs 이세민(당태종李世民 598~649)

베이징을 휘어잡은 고구려 연개소문, 당태종을 떨게하다 1

 

 

 


1. 어릴 적
고구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淵)씨요,

그의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이다.

아버지=태조太祚, 할아버지=자유子遊, 증조부=광廣으로,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지냈다.

603년(홍무14) 5월 10일 서부 대인이자 대대로인 연태조太祚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이 9살(611년)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풍채가 우람하고 기개가 빼어났다.

늘 자신의 군사들과 함께 숲에 누워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 무리와 잘 어울리면서도 최선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포상을 받으면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살폈으며, 마음을 미루어 이해하고 참아두는 아량이 있다. 땅을 씨줄緯로 하고 하늘을 날줄經로 하는 재주에 사람들은 모두 감복하여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판단하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어려움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람들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민족을 해치려는 자를 소인이라 여겼고, 당나라에 대항하는 자는 영웅이로 여겼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화가 나면 권세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을냈다. 참으로 당시대 쾌걸快傑이로다.

언제나 말하길 "나는 물있는 곳에 살아서, 하루종일 물에서 헤엄쳐도 힘이 나고, 피로한 줄 모른다"고 하니, 주위사람들이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대 "창해滄海의 용신龍神이 다시 사람 몸으로 태어났다."라고 했다.

『조대기(朝代記)』  기록. 

※ 연개소문 가계도 : 일본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 선생이 베껴온 '연개소문 가계도'도 있다.

연개소문 유적지가 산동성 어디어디에 있는지 중국측 자료도 많이 있다.

 


2. 동아시아 전쟁영웅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 603~657) vs

당나라 이세민(당태종李世民 598~649)과 부하 설인귀(薛仁貴 613~683)

독립운동가 신채호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고구려 9백년 전통인 호족 공화제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했으며, 장수호태왕 이래로 철석같던 서수·남진 정책을 남수·서진 정책으로 바꾸었다. 그는 태왕 이하의 대신 및 호족 수백명을 도살하고, 자신의 독무대를 만들었으며, 서국 제왕인 이세민(당태종)을 격파하고 천자국 앞에 모두 벌벌 떨게 만들었다. 당시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에서 유일무이한 중심인물이었다."

고려시대 이제현의『사략』

문무에 능한 홍포장군. 연개소문이 “키가 10척이고 진한 붉은색 사자의 복식(獅服)을 입고,

적규마(赤虯馬)를 타고 허리에는 2개의 활집을 매고, 등 뒤에는 5자루의 비도(飛刀)를 둘러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643년(보장2) 당나라 이세민(당태종 598~649)은 

평도(平度 현青岛) 근처인 산동성 마산(馬山 현 即墨区)에서 연개소문에게 사로잡힐 뻔하다가

신라장군 김걸(金杰)의 희생 덕에 가까스로 도망가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쫓겨 도망가는데 강소성 비주邳州, 숙천宿迁, 염성盐城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당나라 부하 설인귀(薛仁貴, 613~683)가 당태종을 구해주러 나선다.​​​​​​

 


3. 618년(함통1) 주화파 고구려 영류태왕 즉위

고구려와 수나라가 화친한 4년 후 618년에 고구려 영양호태왕이 죽고,

주화파인 이복동생 고건무가 즉위한다(영류태왕 高成=高建武). 년호:함통咸通..

당나라 전쟁포로를 돌려주며 화친하고, 신라와 백제를 치는데 주력하니,

서부 대인으로 서쪽을 잘 알았던 연개소문은 이에 극력 반대하여 말했다.
“고구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당나라이지, 신라와 백제가 아닙니다. 지금 신라와 백제는 원한이 깊으므로 우리가 한 쪽과 화친하여 다른 쪽을 견제하면 걱정이 없습니다. 과거에 수나라를 정벌할 기회를 놓쳤으나, 지금 당나라는 아직 국력이 회복되지 않았고 당나라 이건성과 이세민(후일의 당태종)이 서로 죽이려고 하니 지금이 좋은 기회입니다. 두 사람 중 하나가 권력을 잡고 당나라를 정비하여 우리에게 쳐들어온다면, 영토나 인구가 부족한 우리가 무엇으로 저들에게 대항하겠습니까?”
그러나 고구려 영류태왕과 신하들은 듣지 않았다.

4. 631년(함통14)~647년(개화6) 고구려 천리장성

당나라 이세민이 626년에 즉위한 뒤, 고구려 영류태왕은 631년(함통14)에 선비족나라 당나라를 막기 위해 부여국 있던 위치(동북 夫餘縣)에서 서남쪽으로 황하(海 남해부)에 이르는

1천리(400km) 길이의 천리장성을 쌓았다(현 만리장성). 이 장성은 16년에 걸쳐 완성된다.


1) 동북~서남 1천리 장성
『구당서』 "동북쪽 부여성으로부터 서남쪽 물(海)에 이르기까지 1천여 리였다"
『삼국사기』 "동북쪽은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물(海)까지 닿았는데 무려 16년 만에 준공되었다"
『삼국유사』"연개소문이 장성의 축조를 주청하였다" 서부대인답게 '서진정책' 주장!

2) 『삼국사기』"장성의 공사가 시작된 지 11년 후인

642년에 연개소문(28세)에게 공사의 감독을 맡겼다(고구려 영류태왕을 시해한 년도)"
641년(함통24) 현 위구르자치구 쪽에 자리잡고 있던 나라 고창국(高昌國)이 당나라에 패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구려 조정은 깜짝 놀랐고, 이듬해 장성을 보수하는 감독을 맡게 했다.

고구려 연개소문은 자신을 제거하려던 조정의 낌새를 알고, 고구려 태왕 고건무(영류태왕)를 선제적으로 죽이고 권력을 잡는다.


5. 주화파 태왕 고구려 고건무(영류태왕) 살해

기존 고구려 서부 대인이 죽자, 아들 연개소문이 이 직위를 승계해야 하나 신하들이 반대했다.

우예곡절 끝에 대인이 되기는 하였으나, 그가 도성에 있는 것은 불가하다며 장성 북부의 공사를 감독하게 했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 해라장(해상경찰대장)이 당나라의 밀정을 잡았다 놓아주며

'당나라 이세민(당태종)이 고구려에게 조공하지 않으면 당나라를 치겠다'는 서한을 보냈는데, 그는 자신이 연개소문의 수하라고 서한의 끝에 썼다. 이에 당나라 이세민(당태종)은 사신을 보내 사실 여부를 알려 달라고 하였고, 고구려 영류태왕이 해라장을 문초하니 그는 당당하게 자백하였다.
그러자 태왕은 연개소문을 제외한 대인들과 대신을 은밀히 불러 '해라장이 당나라 왕을 모욕한 것은 큰 일이 아니지만 그가 연개소문의 부하라고 한 것을 보면 추종자들이 연개소문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것이 아니냐? 연개소문이 조정을 반대하고 인심을 얻고 있으니 지금 베지 않으면 후환이 생길 것이다' 하며 연개소문이 장성으로 떠나는 날, 어전에서 예를 올린 뒤 기습 체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어전회의 비밀을 연개소문이 먼저 알게 되었고 출발 전에 평양성 남쪽에서 열병식을 빌미로 선수를 치기로 한다. 초대된 대관들이 술을 두어 차례 마셨을 때 연개소문이 신호를 보내자 사방에서 군사들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수백명을 도륙했다.
왕은 변고를 듣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몰래 도망쳐 송양松壤 땅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군사를 모으려 했으나 한 사람도 오는 사람 없고, 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저절로 숨이 떨어져 죽었다(642년 자결). 연개소문은 죽은 태왕의 조카 고구려 고보장(高臧)을 허수아비 태왕으로 추대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모든 권한을 장악하였다.
※『조선상고사』에서는 "연개소문이 영류태왕을 쳐 두 도막을 내고 수채 구멍에 던져 버렸다"고 나옴..

-27대 고구려 영류榮留태왕(고건무高成=高建武 618~642) 년호:함통咸通
-28대 고구려 보장寶臧태왕(고장高臧 642~668)

※개원현수대화보장황제(開原賢秀大化寶臧皇帝) 년호:개화開化

6. 642년 겨울 김춘추(金春秋 603~661)의 고구려 방문

642년(선덕여왕 11년) 7월

백제 의자왕(641~660)이 신라의 미후성 등 40여성을 빼앗고,

8월 백제 윤충이 신라 대야성을 빼앗고 성주 김품석과 아내(고타야, 김춘추 딸)를 죽였다.

신라는 백제에 속수무책 당하며 요충지인 대야성마저 잃었다.

이때 신라 도독都督 김품석의 아내(고타야=곱다)도 죽었는데, 바로 김춘추의 딸!

신라 김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하였다(넋이 빠진 상태). 이윽고 말하기를, “아!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하겠는가?”라고 하고는 곧바로 신라 선덕여왕에게 나아가 “고구려에 외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요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해 겨울, 신라 이찬伊湌이었던 김춘추는 고구려로 가서 원병을 요청하며

"함께 백제를 공격하자"고 말한다.
고구려 태왕인 고장(高臧 보장태왕) 앞에 선 신라 김춘추는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저희 영토를 침범하므로 대국(大國 고구려)의 병사들과 군마(兵馬)를 얻어서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태왕은 “죽령(竹嶺)은 본래 고구려, 즉 우리의 땅이니, 너희 신라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빌려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신라 김춘추는 "대왕께서는 환란을 구원하여 신라와 친선하는 데에는 뜻이 없으시고, 단지 신라 외교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만을 요구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고구려 보장태왕(고장=고보장)이 신라 김춘추의 말의 불손함에 화가 나서 그를 별관(別館)에 가두었다.

신라 김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서 본국 신라 선덕여왕에게 알렸고,

신라 대장군 김유신의 결사대 1만 군이 김춘추를 구출하러 출동했다.

김유신의 결사대가 한강(漢江)을 넘어 고구려 남쪽 경계에 들어가자

고구려 보장태왕이 이를 듣고 김춘추를 놓아 돌려보냈다.

※한강(漢江)=황하 하류(산동반도 쪽)

 


고구려 입장에서 전선이 확대되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기에, 급히 신라 김춘추를 돌려보낸 것이다.

"함께 백제를 공격하자"는 요구를 보이콧 당한 배경으로,

부여의 주몽를 아버지로 삼은 고구려-백제는 같은 피가 흐르지만, 신라는 방계로 여긴 면도 있다.


7. 643년, 당나라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영류왕 '고건무 살해'를 명분으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대패!
당나라 왕 한번 해먹겠다고, 본인 아비를 폐위 시키고, 형과 동생들 다 죽인 천하 호로자식 당태종 이세민 주제에, 이웃국을 향해 저런 소리를 하니, 이건 무슨 자가당착 개그를 하자는 건지...!! 

643년(개화2) 고구려 연개소문이 당나라 이세민과 신라를 공격하여 박살내면서 남진한다.

강소성 염성(盐城)까지 쫓아갔는데, 이세민은 강소성의 한 우물 안에 몸을 숨겨 간신히 살아남는다.

644년(개화3) 고구려는 신라 2개 성을 뺏는다.

 

8. 마산(馬山 현 즉묵시)

고구려 연개소문이 산동성 봉래시에서 당나라 이세민(당태종)의 형을 전사시켰다.

또 산동성 즉묵시(即墨区)에서는 이세민(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포위당해 사로잡힐 뻔했을 때,

신라 출신 용양장군 김걸(金杰)이 이세민(당태종)을 구하고 자신은 죽었다. 이는

<마산지馬山志>라는 그 동네의 기록서에 전해지고 있다.

 

643년의 연개소문-이세민 대결을 목격하고 기록했던 곳,

마산(馬山)은 산동반도 청도(青岛) 근처에 있다.

그 아래로 신라 연운항(连云港)이 있고, 당나라 설인귀와 고구려 연개소문이 전투를 했다는 장소가 있으며, 그 아래로는 당나라 당태종 이세민이 숨었다는 강소성 염성(盐城) 몽롱보탑이 있다.

한국사학계에서는 이 '마산(馬山)'에 대해 "어딘지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9. 연개소문 경극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어니하(淤泥河), 살사문(殺四門)

고구려 남자들이 허리 은띠 왼쪽에 숫돌, 오른쪽에 칼 5자루를 달고 다니며, 늘 날카롭게 숫돌에 칼을 갈고, 칼 5자루 던지는 기술을 연마한다. 10척 거인 연개소문은 진한 붉은색 사자의 복식(獅服)을 입고, 적규마(赤虯馬)를 타고 허리에는 2개의 활집을 매고, 등 뒤에는 5자루의 비도(飛刀)를 둘러맸다. 연개소문의 <비도술>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비도(飛刀)가 일어나 공중에서 춤을 추네.
화살과 비도가 먼지를 일으키며 대적하네.
비도가 화살을 대적하니 노을빛이 찬란하네.
화살이 비도를 대적하니 화염이 일어나네.
공중에서 두 보배가 대적하니
두 장수 모두 신통력으로 겨루네

 



고구려 특유의 비도술, 비검술의 칼 5자루를 찬 연개소문이 주연인 경극 4대 작품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어니하(淤泥河), 살사문(殺四門)은

모두 이천부터 지방에서 공연되었던 희곡들이 정리된 것이다. 큰 줄거리는 당나라 이세민이 봉황산에서 연개소문의 고구려 군대에 대패해 줄행랑을 치는데, 하얀 백포를 입은 당나라 장군 설인귀(平陽郡公 薛禮=薛仁貴, 614~683)가 당태종 이세민을 들쳐업고 겨우 구출한다는 내용이다.

당나라 설인귀와 고구려 연개소문이 주연이고 이세민(당태종)은 조연이다.

 

 

고구려 연개소문은 안시성 싸움의 기세를 몰아

이세민(당태종)을 쫓아 “장안(長安, 당나라 수도)”까지 쫓아가

당나라 이세민(당태종)을 무릎 꿇리고 “항복문서"를 받아낸다.

하지만, (경극에서는) 중국의 영웅 당나라 설인귀에 의해 연개소문은 “죽음”을 맞이한다.

고구려 연개소문의 비도(飛刀)에 당나라 설인귀가 신통력 있는 화살 신전(神箭)을 사용하여

연개소문을 죽이고 나서 병든 몸을 이끌고 독목관을 탈환한다는 게 독목관(獨木關) 스토리..

경극 분하만(汾河灣)에서는 연개소문이 청룡(동방을 지키는 신)으로,

당나라 설인귀(선비족)는 백호로 등장한다.


중국의 경극에서는 주인공인 고구려 연개소문을 싸움의 신 같이 추앙하면서도 마지막 장면에 

당나라 설인귀를 등장시켜 '연개소문을 죽이는 장면'으로 바꿔넣음으로써 “한풀이”를 한 것이다.

한족에게는 당나라 이세민(당태종) 시대는 안시성 전투의 참패로 고구려에게 한이 맺힌 시대다.

그래서 경극에서나마 압도적 무력의 군신 연개소문을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상대하여 한이라도 풀려는 자위적 문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에 대해 1949년 북한 정부는

중국의 경극들이 조선민족의 영웅인 연개소문을 패자로 만들어 비하시키고 나라 간의 단결을 저해한다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중국 문화부는 “우호 국가를 자극하는 공연” 등을 금지하면서 연개소문을 소재로 한 경극은 더 이상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니하, 독목관, 분하만 등의 이야기들이 만들어진 까닭은 그만큼 연개소문이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으며 전투가 치열했기 때문이다. 이를 단순히 전설로만 치부하기에는 그 근처에 연개소문과 관련된 유적 전설이 너무나 많다.

 

 


10. 강소성 몽롱보탑(강소성 염성시盐城市 건호현建湖县)

강소성 비주邳州, 숙천宿迁에서

고구려 연개소문과 당나라 설인귀가 격전을 벌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장 유명한 강소성 염성(盐城)에서는 몽롱보탑(夢窿寶塔)의 전설과 함께 그 탑이 아직도 남아있다.

당나라 이세민(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도망가다가 거미줄이 쳐진 빈 우물에 숨어 겨우 살아났는데, 나중에 이 은공을 잊지 못해 그 우물이 있는 곳에 탑을 세웠다. 어려움에 처해 있다 살아났을 때, 그 상태를 꿈처럼 '몽롱(蒙朧)하다'라고 표현한다.

 


몽롱탑(夢窿寶塔) 관리인이 말한다. "중원 동쪽에서 연개소문이 전쟁을 일으켜 중원을 공격했다.

당나라 왕 이세민이 연개소문을 이곳 강소성까지 추격하다가 도리어 연개소문에게 쫓기게 되었고, 우물 아래로 숨어들었다. 우물 위에 거미줄이 가려서 시야를 가렸기에 연개소문은 '숨은 이세민'을 알아채지 못하고 가 버렸다. 이세민이 살아난 것을 기려 그 자리에 보탑을 세웠는데, 이름이 '몽롱탑(夢窿寶塔)'이다"
이곳 중국 동해현 강소성은 신라 땅이었다는 얘기다.

고구려-백제가 신나게 신라의 수십개 성을 뺏던 시기인지라, 이곳에 살던 신라 김씨 사람들이 당나라 이세민을 숨겨주고, 연개소문이 지나간 뒤 무사히 도망가게 길도 터 준 것!!

 

 

몽롱보탑(夢窿寶塔) 바로 위 동해 강소성 연운항(连云港)은 '600여개 떼무덤'으로 유명한 곳이다.

7~9세기 돌방무덤인데, "신라사람들이 살았기에 신라무덤들이 이렇게 많이 발견되었구나" 하는 상식적 해석 대신 "왜 신라식 무덤들이 여기서 나오지? 한반도 이주민들이 많이 있었나 보다" 하는

신박한 '어거지 해석'을 들이대며 끼워맞춘다.

 



한반도에서 신라의 이런 떼무덤이 나타나질 않는다. 600개가 발견되는 곳,

이곳이 신라의 본토!!

이듬해 644년(개화3), 고구려 연개소문이 신라의 2개의 성을 함락했고,

당나라 이세민은 상리현장(相里玄奬)을 고구려에 보낸다.

연개소문은 "신라가 빼앗아 간 땅(629년 김유신이 함락한 낭비성)을 돌려주지 않으면 전쟁을 멈출 수 없다"고 답했다.
 

 

(2편에 계속)

기사 링크 https://www.imnews.tv/news/article.html?no=699798

 

 

글 : 고려, 삼국 역사복원 협회,  고려사 복원 학회. 이사  Chris Kim

공저 : <책보고 99개 한국사 강의 요약서>

Chris Kim 기자 lodin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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