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틀렸다. 신라 우산국은 울릉도가 아니다. 원서로 보는 위치. 한국사 수정 불가피 1. 문헌 사료에 기록된 신라 ‘우산(于山)국’ 사건 한국 고대사의 여러 쟁점 가운데, 신라 우산국(于山國)을 둘러싼 논의는 단순한 지명 비정(比定)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대사를 어떤 공간 인식 위에서 이해해 왔는가, 그리고 그 해석이 과연 세계사적·과학적·논리적 기준을 충족하는가를 묻는 문제다. 본 글은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기록된 2개의 우산국 사건 ① 신라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512년)과 ② 고려 현종대 여진의 우산국 침입과 구휼(1018년)을 대상으로, *‘설명비용(explanatory cost)’이라는 논리학적 기준을 적용해 기존의 한반도 울릉도 중심 해석과 중국 대륙 중심 위치 해석을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설명비용: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군더더기 논리 1) 사료가 말하는 신라 ‘우산국’ 사건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우산국은 명주(溟州) 동쪽 바다 가운데 섬이다. 산세가 험하여 복속하지 않았다. 신라 이사부 장군이 전함에 목각 사자를 싣고
고려 시대 존재하던 한글? 문헌 속 기록 훈민정음 창조 전에 존재하던 우리 글. 이 글은 세종대왕을 비난하거나 비판하고자 쓰는 글이 아니다. 오해는 없으시길 바란다. 훈민정음의 체계는 세종대왕이 창제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언문(諺文, 암클, 여자글)이 고려시대에도 존재 했을것으로 보이는 기록을 살펴 보고자 한다. 세종대왕 시기에 언문(諺文) 또는 암클이라는 글이 있었다. 언문은 상놈의 글이란 뜻이며 암클이란 여자들이 사용한 글자라는 뜻이다. 당시 우리글을 비하하여 부르던 이름이다. 아래 기록을 보자. 1. 세종실록의 기록에 "형태는 옛 글자를 본 떠 만든 글자다." (형이자방고전. 形而字倣古篆)이라고 되어 있다. 2. 당시 집현전 학자이던 최만리(해동공자 최충의 12대손)의 상소문 기록을 보면 "옛 조정(前朝, 고려)에는 언문(諺文)이 있었고 ... 어찌 그대로 답습하며 따르기만 하겠는가? (借使諺文自前朝有之, ... 尙肯因循而襲之乎?)"라고 하며 "그 언문은 본래 옛 글자를 본뜬 것이다.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라고 한다.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602020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중국 동북공정의 본질 = 한국 없애기 한국과 중국. 역사의 영토가 겹쳐진다. 역사의 해석, 중심영토, 두 나라의 존망을 건 치킨 게임으로 영토 해석에 타협점은 없다. 역사 해석을 할 때 우리가 중국 대륙의 동남부 비옥한 땅을 주장하여 다 먹느냐? 아니면 중국에 한반도까지 다 먹히느냐의 싸움입니다. 한반도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대륙에 본토가 존재하던 삼국시대를 부정하면 중국이 잘도 타협 양보할 거라구요? 한반도 영토까지 먹히고 싶으신 겁니까? 중국의 원래 영역은 서안과 중경을 중심으로한 태행산맥 서쪽의 작은 지역(원래의 요서)이었다. 명나라때까지만 해도 티벳 만주 신장 내몽고 운남은 중국 영토가 아니었다. [중공이 동북공정에 목숨을 거는 이유] 1. 국제 역학 관계에 변동이 생겨 국력이 쇠약해질 경우, 티벳, 만주 동북3성, 신장, 내몽고, 운남, 태행산맥 동부 지역이 독립하고 중국은 내륙의 척박한 장안, 중경을 중심으로 한 작은 지역으로 남게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2. 한국 고대사가 밝혀지면 만주와 중국 동부, 태행산맥 동쪽 평야 지역(북경에서 광동까지)이 한국 땅으로 될 것이고 3.
발해가 건국한 곳 영주(營州)는 어딘가? 대학 교수, 강사, 정부 역사 기관들에서는 어딘지 찾아볼 생각 자체가 없고, 그나마 일반인 재야사학, 민족사학자들은 찾아보려고 애쓰지만, 수십년간 엉뚱한 이곳저곳 들쑤시는 중인 우리 역사 주요 지명, 영주(營州)! 중국 북조와 고구리와 고리의 강역으로 중요한 지명이다. 누구나 기록과 위성지도, 고지도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구당서> 발해말갈전에 대한 국사편찬위 역주는 번역을 제대로 안 해 놓아서, 중간중간 잡서 인용과 잡소리 역주 빼고 제대로 번역, 요약해서 소개한다. 대륙 산서성 태원(太原) 연(燕)=기주冀州· 유주幽州· 영주營州(朝陽) 1. 연(燕)나라는 유주(幽州), 제나라는 영주(營州)로 부름 요서, 북평의 2군 포함한 지역. 북위때 영주(營州)는 용성으로 불러 다스린다. 북위의 영주(營州) 치소는 창려, 건덕, 요동, 낙랑, 기양, 영구.. 하·상시대 기주(冀州) 주나라 유주(幽州) 춘추전국시대 연(燕) 진시황과 한나라때 요서 연燕나라때 유주(幽州), 제齊나라때 영주(營州) 북위의 땅이고, 수나라의 땅 당나라때 모해의 땅(唐初爲韓唐莫奚所據), 안록산의 난 때 쫄보왕 이융기가 사천성으로
한국 고대사, 중세사 해석의 문제. 식민지 한국사 학계, 해석의 한계 '비정(比定)'을 걷어내자 대한민국 역사책인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의 국사편찬위 해석을 보면 온통 그 위치를 '추정한다'. '비정한다.' 등 모르겠다는 표현을 묘하게 적어 놓았다. 당연히 그 추측한 위치들을 현재 교과서, 박물관 등에서는 확정된 양, 진실인 양, 가르친다. 이제 그 엉터리 위치들에 대한 해석을 뜯어 고칠 때다. "고조선의 왕검성은 평양으로 비정된다." "패수는 청천강으로 비정된다." 이게 뭔 개소립니까 ? [국사편찬위 사이트. 고조선,삼국시대,고려 시대 현장의 위치를 모르겠다고 다양한 변명으로 적어놨다.] 1. 역사의 해석시 위치 '비정'은 책임 회피의 언어입니다. '비정(比定)'은 일본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의 방법론을 들여오며 만든, 일본식 한자어(Hitei)입니다. 견주어(Compare) 정한다(Decide)는 뜻인데, 여기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내 논리로 보니 대충 여기가 맞는 것 같으니 그리 알라는 식의 강요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가 한반도 안에 억지로 우리 대륙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새롭게 다시 해석하는 광개토태왕 비문 1. 발견부터 의문 19대 광개토호태왕(391~414) 비석문은 1881년 회인지역에 사는 한족(漢族) 문사 왕언장(王彦莊)이 처음 발견.. (과연 그 큰 돌기둥 사면에 글씨가 써 있는 걸, 그제서야 처음 봤다는 걸 믿어야 하나? 그것도 만주지방에 밑받침과 지붕도 없는 채로인 것을??) 해독할 수 없어서 만주의 문우 장백산인 영희소봉(榮禧筱峰)에게 말하였다. 소봉도 처음에는 탁본을 해서 "위(魏)의 비문 아닐까?" 했다고 했다. 태왕의 석비에 고구리(高句麗)라는 글자가 없었던 탓이다. 영희소봉씨가 일본군에 접근한 이유와 조건 없이 해석문과 탁본을 건내 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의 의혹스런 행적 때문에 연구성과도 매도당한 입장이다. 2. 러일전쟁 때 탁본이 돌고, 1908년에야 조선인이 이 존재를 인지 1904년 러일전쟁이 있었고, 영희소봉은 회인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감 大原 소좌에게 비문 해독문(본래 글씨체를 한자로 옮긴 것)을 기증했다. 大原은 해독문을 일본 박물관에 보냈고, 大原보다 먼저 회인에 근무했던 佐川 소좌가 탁본문을 가지고 갔다. 1908년 한국인들의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고리KOREA(고구리)는 독자 년호를 쓴 천자국 독자적 년호를 쓰면 '천자국'(天子國 황제의 나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천자의 죽음을 무덤비문에 '붕어(崩御)'라고 적는다. 고구리는 장수호태왕 이후 공식국호가 선조들의 나라이름이었던 '고리(高麗)'였고, 왕들을 '태왕(太王)'이라 불렀다. 러시아 모스코바 국립도서관에 있던 요나라 제천행사를 기록한 <요천제 – 고리황제품위(高麗皇帝品位)>와 청나라 제천행사를 기록한 <만주대제 – 고리대제의예(高麗大祭儀禮)>라는 책들이 세상의 눈길을 끌게 되면서, 요나라 태종(야율요골=야율덕광 926~947)과 청나라 강희제(애신각라 현엽玄燁=히오완예이 1661~1722)에 의해 추증된 고구리 태왕들의 년호 및 묘호가 밝혀져 학계의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아래 고구리 태왕들의 년호자료가 증명하듯이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에 찌들어 있는 강단사학계에서 위서(僞書)라고 말하는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 기록된 고구리 태왕들의 년호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바, 지금까지 중국, 지나국가 지방정권이라 비하매도한 고구리 역사 논리는 폐기되어야 할
환단고기 고리국( 고려 高麗國 本紀) 3부 15. 고리 하동 河東사람. 정지상鄭之祥 바얀테무르(王伯顔帖木兒 생몰 1330~1374)라는 이름으로 원나라 황실에 살던 시절의 공민왕 왕과 친분이 있었던 고리 사람 정지상鄭之祥.. 그는 누이 일로 마실 나가듯 가까운 원황실(대도)에 왔다갔다 하다가 공민왕(왕전王顓, 1351~1374)과 친분을 쌓았고, 공민왕이 고리 궁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수행하게 된 것이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바로 뽑혀서 감찰지평(監察持平) 직을 맡았는데, 일을 처리함에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찍이 전라도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임지에 가서, 세도가가 권세를 부리는 것을 보면 즉시 잡아다가 문초하고 모든 고을에 이를 알리니, 도道 사람들 간담이 서늘하였다. 야사불화埜思不花는 본국(고리高麗) 사람인데 원나라에 들어가 원15대 우카가투 칸(순제 1333~1370)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형 서신계徐臣桂는 육재(六宰)가 되고, 동생 응여應呂는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세력을 믿고 권력을 남용하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야사불화가 강향사(降香使)라는 직함을 받고 본국(고리)에 와서는 가는 곳마다 포악하게 굴었다. 이때
환단고기 고리국 (고려, 高麗國 本紀) 2부 7. 고리 윤관의 동북9성 1107년(예종 2) 고리 도원수 윤관(尹瓘 ?~1111)을 원수(元帥),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는 17만군이 여진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영주·웅주·복주·길주 등에 9성을 쌓았다. 두 장군이 선춘령(先春嶺=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아들 윤언이尹彦灑를 임금에게 보내 표를 올려 하례하게 하였다. 8. 동북9성을 여진에게 돌려 줌 여진이 요불褭弗과 사현史顯 등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이렇게 아뢰었다. “옛날 저희 태사(太師) 영가盈歌는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선조는 대국(고리高麗)에서 출생하였으니 자손 대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귀부함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도 역시 대국(고리高麗)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1104년 궁한리 사람들이 스스로 난리를 일으켰으나, 이는 본래 태사가 지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국조(고리高麗)에서 죄를 물어 이들을 토벌하였으나 다시 수교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 저희 늙은이와 어린아이를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환단고기 고리국 (고려, 高麗國 本紀) 1부 1. 고구리 검모잠(鉗牟岑)과 안승(安勝) 668년 고구리가 망한 후, 고구리 수임성(高句麗水臨城) 사람 대형(大兄) 모잠(牟岑=검모잠=겸모잠)은 남은 백성들을 모아 안승安勝을 받들어 후고구리왕(보덕왕 안승 669~671, 674~683)으로 삼고 신라에 원조를 청하였다. 신라왕은 나라의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했다가 뒤에 '보덕왕(報德王)'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김정명政明 681~692)은 즉위하더니 보덕왕을 거두어 소판(蘇判)으로 삼았다. 그의 조카뻘인 대문(大文)이 금마저에 머물면서 반란을 꾀하여 왕을 참칭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남은 무리들이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報德城)을 점거하고 다시 반역을 꾀하였으나 신라에게 평정되었다. 그곳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겨 살게 했다. 2. 후고구리 궁예(弓裔) 후고구리, 태봉국의 왕 궁예(泰封國王弓裔)는 그 선조가 평양사람(平壤人)으로 본디 보덕왕 안승(報德王安勝)의 먼 후예이다. 그의 아비 강(剛)은 역술인 말에 따라 어머니의 성씨를 따서 궁씨(弓氏)가 되었다. 발해 대진국 13대 명종 경황제(대현석大玄錫 872~8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