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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리국 본기(高句麗國 本紀) 제6 (2부)
14. 27세 영류무장태혜천황제=함통제(고성高成, 618~642), 년호: 건무建武
좌장군 고성(高成 27世 영류제榮留帝)은 속으로 수나라와 친할 마음이 있어 은근히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의 북벌계획을 막았다. 이때 고성高成은 여러 차례 청해서 출사하여 백제를 공격함으로써 공을 세웠다. 그러나 막리지는 홀로 대중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수북벌(南守北伐策 남쪽을 현상유지하고 북쪽을 공략)의 정책을 고수했다. 여러차례 이해관계를 들어 말하므로 대중이 이 말에 따르게 되었다.
마침내 618년 고성高成이 즉위하니(영류제) 전 황제(영양제)의 모든 정책은 폐기되었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노자의 상老子像을 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도덕경道德經을 듣게 하였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으니 부여현夫餘縣~남해부南海府에 이르는 1천여 리이다.
이때 서부대인 연개소문은 도교道敎를 강론하는 것과 장성 쌓는 일을 그만 둘 것을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극진히 설득하려 했으나, 열제는 기꺼워하지 않고 연개소문의 병사를 빼앗고는 장성을 쌓는 일의 감독을 시키더니, 은밀하게 뭇 대인과 더불어 의논하여 연개소문을 주살코자 하였다.
연개소문은 앞질러 이 말을 들을 수 있어 장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이몸이 죽고 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일은 급하다. 때를 잃지 말지라.'
하고 모든 부장을 모아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하고는 성대하게 술상을 벌려 뭇 대신을 초청하여 함께 이를 시찰하자고 하였다. 모두가 참석하자 연개소문이 큰소리로 말하길 "문 앞에 범과 여우가 다가오는데 민중 구할 생각은 않고 되려 나를 죽이려 하는가?" 하고는 결국 다 죽였다.
열제는 변고를 듣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몰래 도망쳐 송양松壤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군사를 모으려 했으나 한 사람도 오는 사람 없고 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저절로 숨이 떨어져 죽었다(642년 자결).
15. 연개소문(淵蓋蘇文 603~657, 55세)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淵)씨요, 그의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이다. 아버지=태조太祚, 할아버지=자유子遊, 증조부=광廣으로,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지냈다. 603년(홍무14) 5월 10일 태어났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풍채가 우람하고 기개가 빼어났다. 늘 자신의 군사들과 함께 섶에 누워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 무리와 잘 어울리면서도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받으면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살폈으며, 마음을 미루어 이해하고 참아두는 아량이 있다. 땅을 씨줄緯로 하고 하늘을 날줄經로 하는 재주에 사람들은 모두 감복하여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어려움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숨어 해하려는 자를 소인이라 여겼고, 능히 당나라에 대적하려는 자를 영웅이라 여겼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면 권세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快傑인저!
스스로 말하길 "나는 물 가운데 살아서, 하루종일 물에 잠겨 헤엄쳐도 더욱 힘이 나고, 피로한 줄 모른다"고 말하니, 무리들이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대 "창해滄海의 용신龍神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이로다"라고 했다.
연개소문은 마침내 고성제高成帝를 내어 쫓고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高臧을 맞아들였으니, 이가 28세 보장황제(寶臧皇帝 642~668)=개원현수대화보장황제(開原賢秀大化寶臧皇帝).. 년호: 개화開化
연개소문은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정기 자유 개물 평등, 즉 자기를 이루어 스스로 행하고 온갖 것의 이치를 깨달아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살도록 하는 공도(公道)에 따라 모든 법을 행했다. 세 고을(삼홀)마다 '전佺'을 두고, 조의선인皁衣仙人에게는 '율(계율)'이 있게 했다. 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하였다.
먼저 백제의 상좌평(上佐平 성충)과 함께 양국이 모두 존립할 방안을 의논하고, 신라의 사신 김춘추金春秋를 청하여 자기 집에 머무르도록 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한 자가 많아 짐승에 가깝소.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형제의 나라인 삼국이 백성들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들어가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이긴 뒤에 우리의 옛 영토(당나라)에 연방정권을 세우고 인의仁義로써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히 지켜나가기로 함이 어떻겠소?"
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하였으나, 춘추는 끝내 듣지 않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16. 이세민(李世民 당 오랑캐)의 침략
645년(개화4) 당나라 이세민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우리의 땅이다. 수나라가 네번 출사하였어도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제 출병하여 우리 자제들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고 하였다. 세민은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이세적李世勣, 정명진程名振 등과 수십만 군사를 이끌고 요택遼澤에 이르렀다. 진흙뼐이 200여리여서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었다.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말에 채찍질하며 달려가 공격했지만 이미 싸움을 벌였던 행군총관行軍摠管 장군차張君叉는 대패했다. 이도종李道宗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고 세민은 몸소 수백기를 이끌고 세적과 합쳐 백암성白岩城의 서남쪽을 공격했다.
백암성주인 손대음孫代音은 짐짓 항복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으나, 실은 틈을 엿보아 반격하고자 하였다. 세민은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먼저 당산唐山으로부터 병사들을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북부의 욕살(褥薩 총사령관)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은 관병 및 말갈병 15만을 이끌고 똑바로 전진하여 안시에 맞닿은 보루 바로 앞 험난한 높은 산에 진지를 쌓고 성의 곡식을 식량으로 삼고, 병력을 종휭무진으로 풀어 놓아 당나라 군마를 약탈했다. 당나라군을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 돌아가려고 해도 진흙길이 가로 막았으니 가만히 앉아서 패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연수는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에서 곧장 앞으로 40리 나아가서는, 사람을 보내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에게 대책을 물었다. 그는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아서 모든 일에 익숙했다.
고정의가 대답하기를,
"이세민은 안으로 군웅들을 제거하고 집을 바꿔 나라를 이루었으니 역시 범상하진 않소. 지금 모든 당나라의 모든 병력이 떨치어 나왔으니 업신여길 수가 없소. 우리들로서 바람직한 것은 군대를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여러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며, 날랜 병사들을 보내 그 식량 보급의 길을 끊는 것보다 좋은 계책은 없소. 식량이 이미 끊겨 싸우고자 하나 싸워주지도 않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결국 이기기 마련이오" 라고 하였다.
고연수는 그 계략에 좇아 적이 오면 막고, 적이 도망가면 곧 추격을 멈추고, 또 날랜 병사들을 파견하여 식량의 길을 끊고, 불태우거나 빼앗았다. 이세민은 온갖 계책을 쓰고, 뇌물로 꾀려고까지 했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는 속으로는 어겼다. 수시로 습격을 감행하여 마구 무너뜨리니 적군의 사상자는 쌓여만 갔다. 고연수 등은 말갈과 병력을 합쳐 진지를 펴고 지구전을 벌이다가 어느날 저녁 표변하여 작전을 개시하여 급히 습격하여 번개처럼 치니, 이세민은 거의 포위될 뼌하게 되자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이세민은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재물과 보화를 보내면서 연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귀국의 힘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그 죄를 물으려 온 것이다. 그대의 나라에 들어와서 싸움을 하게 됨에 말 먹이와 식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서 얼마간 노략질을 몇 곳에서 했었을 뿐이니, 그대의 나라가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리면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연수는 말했다. "좋다, 그대의 군사가 30리를 후퇴하면 곧 나는 우리 황제를 알현코자 한다. 그렇지만 막리지는 우리나라의 기둥이자 반석이다. 엄연히 군법을 스스로 갖고 있으니 많은 말도 팔요가 없다. 그대의 임금 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동생의 아내弟嫂를 음란하게도 받아들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죄를 물을 만하다. 이 뜻을 이세민에게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시관을 보내 더욱 더 방비를 굳혔다. 산에 의지하여 전지를 굳히고 허를 틈타 기습하니, 세민은 온갖 계략을 다 써도 어쩔 수가 없어 요동 출병의 패배를 통한히 여길 뿐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당나라 6군은 고구리의 조롱거리가 되고 거의 떨쳐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척후병이 영공의 군기는 흑색 깃발(고구리 군기)로 에워싸였다고 보고하니 세민은 크게 놀랐다. 위급함과 두려움을 못 이겨 결국 내뺀 세민에 대해 <신구당서唐書>와 사마공의 <통감痛>이 이를 적지 않음은 나라를 위해 치욕스러운 일을 숨기려 함이었다.
17. 안시성 전투(645년)
이세적은 세민에게 말한다. "건안建安은 남쪽에 있고 안시安市는 북쪽에 있습니다. 우리 군대의 양곡은 벌써 요동遼東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성安市을 넘어 건안建安을 습격하는데 만일 고구리가 수송로를 끊으면 군세는 궁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안시安市를 공격함만 같지 않습니다. 먼저 안시가 우리 수중에 떨어지면 곧 북치고 행진하여 건안建安을 취하면 그뿐일 것입니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이 덮어오는 것을 멀리 바라보며 성위에 올라 북치고 떠들며 그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침을 뱉으며 욕을 하며 세민을 조롱했다. 세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성을 함락시키는 날 성중의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하겠다고 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에 장량(張亮 수군제독水軍提督, 당의 형부상서를 지냄)은 사비성沙卑城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이리저리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장량이 군사를 움직여 오골성烏骨城을 습격하려 했으나, 도리어 관군에게 패했다. 이도종(李道宗, 강하군왕江夏君王에 봉해졌고 예부상서에 오름)도 역시 험악한 길에 발이 묶여 힘을 쓸 수 없었다. 당군의 여러 장수들의 의견도 갈라졌다. 세적世勣만이 홀로 "고구리가 온 나라를 기울여 안시성을 구하려 하니 안시성을 버리고 바로 평양으로 치고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장손무기는 "천자天子가 친히 원정에 나섰으니, 여러 장수가 군사를 이끄는 경우와 달라 요행을 바라고 행동한다는 건 안될 일이오. 지금 건안성建安과 신성新城의 적은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의 군대도 역시 수십만이오. 국내성의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와서 낙랑의 여려 험로를 막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포위를 당할 것이오.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고 그런 후에 천천히 진격하여야만 하오."라고 했다.
이 문제가 채 결론도 나기 전에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은 그러한 사정을 듣고 밤 깊음을 틈타 수백명의 정예를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니 적진은 스스로 서로 밟고 찔러 살상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세민世民은 이도종李道宗을 시켜 흙산土山을 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였다. 두달간 공력을 기울여서 흙산에서 성을 내려다볼 정도로 높이 쌓았을 때, 갑자기 흙산이 와르르 무너졌고, 고구리 병사들이 성의 무너진 곳으로 출격하여 마침내 흙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키니 고구리군의 군세가 더욱더 드높아졌다. 당군의 여러 진은 거의 싸울 힘을 잃었다. 부복애傅伏愛는 패전으로 목잘려 죽고 도종道宗 이하 모두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연개소문)는 기마병 수백 기를 이끌고 난파(灤坡 난灤언덕)를 순시하며 주둔하다가, 상세하게 정세를 듣더니 사람을 보내 총공격하여 사방을 칠 것을 명하였다. 연수高延壽 등도 말갈병과 합쳐 협공하고 양만춘楊萬春은 성위에 올라가 싸움을 격려하니 사기는 더욱 떨쳐저서 일당백의 용맹이 없는 자가 없었다.
세민은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서 감히 나서서 싸우려 했다. 양만춘은 이에 소리지르며 활을 당겨 날렸다. 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마침내 눈알이 빠져버렸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세적世勣과 도종道宗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뻘은 군사와 말이 다니기 어려웠다. 장손무기無忌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 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똥줄이 탄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사역을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浦吾渠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 메우기를 독려하면서 여러 군사들이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士卒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려야 했다. 이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하여 이들을 매우 바르게 추격했다. 추정국鄒定國은 적봉赤峰에서부터 하간현河間縣에 이르고, 양만춘楊萬春은 곧바로 신성新城으로 나아가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당나라 군대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이수(역수易水)를 건넜다. 이때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통도성(桶道城 지금의 고리진高麗鎭)을 고쳐쌓게 한다. 또 군사를 여럿으로 나누어서 하나는 요동성(현 좌권현)을 지키게 하고, 또 하나는 상곡(上谷 좌권현 바로 위)을 지키게 하였다. 이에 세민世民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했다.
막리지莫離支는 추정국定國, 양만춘萬春 등의 수만 기병을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長安에 입성했다.
18. 장안長安 약정
장안長安에서 이세민과 약정을 맺어 산서山西, 하북河北, 산동山東, 강좌江左가 모조리 고구리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리는 백제와 더불어 함께 요서의 땅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요서遼西 땅에 백제령으로 진평晋平2군이 있고, 강남(양자강 아래)에 월주越州가 있었다(속현: 산음山陰, 산월山越, 좌월左越).

19. 연개소문 죽음(657) 이후
657년(개화16) 막리지가 임종에 남생, 남건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 형제는 물과 같이 사랑하라. 화살은 묶으면 강하고, 나누면 쉬이 부러진다. 부디 이 아비가 죽어가며 하는 말을 잊어 천하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왕개보(반산半山 왕안석王安石 1021-1086 宋정치가, 당송8大家)가 말했다. "연개소문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더니 과연이로다. 막리지가 있은즉 고구리와 백제가 공존하더니, 막리지가 없자 백제와 고구리는 함께 망했다. 막리지는 역시 인걸이로다."
20. '임나'=대만+마조열도(臺灣+馬祖 대마)의 서북 경계
북은 海(당시 큰 강)로 막히고, 국미성을 중심으로 다스렸는데,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다. 때로는 조공하고 때로는 반란을 일으켰다. 뒤에 대마의 두 섬 대만+마조(臺灣+馬祖)는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가 되었다.
임나는 또 갈려서 좌호, 인위, 계지의 3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는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 때부터 세 한汗(가라의 왕)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400년(영락10), 3가라가 모두 고구리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가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을 했다. 그러나 고구리에 속하여 열제의 직할령이었으므로, 열제의 명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
p.s 을밀대, 을밀선인이 세운 것
을밀은 을소의 후손으로, 22세 안장제(519~531) 때 뽑히어 조의(皁衣)가 되고 나라에 공이 있었다. 집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배우며 삼신을 노래하고 무리를 모아 수련시키고, 의롭게 용감하게 나라를 받드니, 당대 최고의 조의(皁衣)가 되었고 그의 무리는 3,000이었다. 가는 곳마다 구름처럼 모여서 '다물흥방'의 노래를 불렀다. 이에 의하여 그 몸을 던져서 의를 다한다는 풍속이 고취되었다.
<다물흥방가>
먼저 살았던 선조는 우리의 모범
뒤에 오는 후손은 우리의 상전
모범이기 때문에, 날 것도 사라질 것도 없으며
상전이기 때문에, 귀할 것도 천할 것도 없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
우리의 마음과 몸은 누리의 바탕한다.
하나이기 때문에 비어있든, 차있든, 같은 것이며
바탕이기 때문에 신(마음)과 물질(몸)은 둘이 아니다.
참됨은 온갖 착함의 극치이고
신(神=하늘마음)은 '참 나(내안의 나=양심)'를 주관한다네
극에 다다라, 세가지 참(三眞)은 하나가 되고
하나의 신(하늘마음)은 곧 性命精 셋으로 펼쳐지네.
하늘 위 하늘 아래 다만 내가 스스로 있음이여
다물하여 나라를 일으켜야지.
스스로 있기 때문에 티 없이 일을 하고
나라를 일으키니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게 되네.
참 목숨(命) 크게 살아, 하늘마음(性)에 통하여 광명(빛=환함)에 이르세.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네.
광명으로 모든 선을 행하고
효충으로 모든 악을 짓지 않네.
민중이 의로우니, 나라가 튼튼하다.
나라없이 내가 어찌 살아가리.
나라가 튼튼하니, 민중이 복을 누리고
내가 살아있기에 나라에 넋(魂)이 있고 덕을 누리네
넋이 있어, 생生을 낳고 각覺을 낳고 영靈을 낳네
하늘마음(神)이 머무는 곳이 바로 하늘궁(天宮)이 되네
세 넋(三魂=生+覺+靈)이 있어서 지혜도, 생도 함께 닦을 수 있고
하늘마음(一神)이 있어서 몸과 넋이 함께 이루는 것이라
우리들 자손이 대를 이어 착함으로 나라를 이루니
태백의 가르침은 우리의 스승일세
우리 자손들은 그래서 다 고루 평등하고
우리 스승들이 물려내려준 가르침은 늘 새롭구나!
을밀선인은 일찌기 을밀대에 살면서 하늘에 제사올리고 수련함을 임무로 삼았다. 대개 선인의 수련법은 참전(參佺)으로 계(戒)를 삼아 스스로를 굳세게 하고 영광되게 한다. 나를 비워 온갖 것이 있게 하고 몸을 던져 옳음을 지켜서 나라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천추에 우러러 감흥을 일으킬 만한 것이니, 사람들의 존귀함을 보여준다 하겠다. 후세 사람들은 그 대를 칭하여 '을밀'이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