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 중세사 해석의 문제. 식민지 한국사 학계, 해석의 한계 '비정(比定)'을 걷어내자 대한민국 역사책인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의 국사편찬위 해석을 보면 온통 그 위치를 '추정한다'. '비정한다.' 등 모르겠다는 표현을 묘하게 적어 놓았다. 당연히 그 추측한 위치들을 현재 교과서, 박물관 등에서는 확정된 양, 진실인 양, 가르친다. 이제 그 엉터리 위치들에 대한 해석을 뜯어 고칠 때다. "고조선의 왕검성은 평양으로 비정된다." "패수는 청천강으로 비정된다." 이게 뭔 개소립니까 ? [국사편찬위 사이트. 고조선,삼국시대,고려 시대 현장의 위치를 모르겠다고 다양한 변명으로 적어놨다.] 1. 역사의 해석시 위치 '비정'은 책임 회피의 언어입니다. '비정(比定)'은 일본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의 방법론을 들여오며 만든, 일본식 한자어(Hitei)입니다. 견주어(Compare) 정한다(Decide)는 뜻인데, 여기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내 논리로 보니 대충 여기가 맞는 것 같으니 그리 알라는 식의 강요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가 한반도 안에 억지로 우리 대륙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새롭게 다시 해석하는 광개토태왕 비문 1. 발견부터 의문 19대 광개토호태왕(391~414) 비석문은 1881년 회인지역에 사는 한족(漢族) 문사 왕언장(王彦莊)이 처음 발견.. (과연 그 큰 돌기둥 사면에 글씨가 써 있는 걸, 그제서야 처음 봤다는 걸 믿어야 하나? 그것도 만주지방에 밑받침과 지붕도 없는 채로인 것을??) 해독할 수 없어서 만주의 문우 장백산인 영희소봉(榮禧筱峰)에게 말하였다. 소봉도 처음에는 탁본을 해서 "위(魏)의 비문 아닐까?" 했다고 했다. 태왕의 석비에 고구리(高句麗)라는 글자가 없었던 탓이다. 영희소봉씨가 일본군에 접근한 이유와 조건 없이 해석문과 탁본을 건내 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의 의혹스런 행적 때문에 연구성과도 매도당한 입장이다. 2. 러일전쟁 때 탁본이 돌고, 1908년에야 조선인이 이 존재를 인지 1904년 러일전쟁이 있었고, 영희소봉은 회인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감 大原 소좌에게 비문 해독문(본래 글씨체를 한자로 옮긴 것)을 기증했다. 大原은 해독문을 일본 박물관에 보냈고, 大原보다 먼저 회인에 근무했던 佐川 소좌가 탁본문을 가지고 갔다. 1908년 한국인들의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고리KOREA(고구리)는 독자 년호를 쓴 천자국 독자적 년호를 쓰면 '천자국'(天子國 황제의 나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천자의 죽음을 무덤비문에 '붕어(崩御)'라고 적는다. 고구리는 장수호태왕 이후 공식국호가 선조들의 나라이름이었던 '고리(高麗)'였고, 왕들을 '태왕(太王)'이라 불렀다. 러시아 모스코바 국립도서관에 있던 요나라 제천행사를 기록한 <요천제 – 고리황제품위(高麗皇帝品位)>와 청나라 제천행사를 기록한 <만주대제 – 고리대제의예(高麗大祭儀禮)>라는 책들이 세상의 눈길을 끌게 되면서, 요나라 태종(야율요골=야율덕광 926~947)과 청나라 강희제(애신각라 현엽玄燁=히오완예이 1661~1722)에 의해 추증된 고구리 태왕들의 년호 및 묘호가 밝혀져 학계의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아래 고구리 태왕들의 년호자료가 증명하듯이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에 찌들어 있는 강단사학계에서 위서(僞書)라고 말하는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 기록된 고구리 태왕들의 년호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바, 지금까지 중국, 지나국가 지방정권이라 비하매도한 고구리 역사 논리는 폐기되어야 할
환단고기 고리국( 고려 高麗國 本紀) 3부 15. 고리 하동 河東사람. 정지상鄭之祥 바얀테무르(王伯顔帖木兒 생몰 1330~1374)라는 이름으로 원나라 황실에 살던 시절의 공민왕 왕과 친분이 있었던 고리 사람 정지상鄭之祥.. 그는 누이 일로 마실 나가듯 가까운 원황실(대도)에 왔다갔다 하다가 공민왕(왕전王顓, 1351~1374)과 친분을 쌓았고, 공민왕이 고리 궁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수행하게 된 것이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바로 뽑혀서 감찰지평(監察持平) 직을 맡았는데, 일을 처리함에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찍이 전라도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임지에 가서, 세도가가 권세를 부리는 것을 보면 즉시 잡아다가 문초하고 모든 고을에 이를 알리니, 도道 사람들 간담이 서늘하였다. 야사불화埜思不花는 본국(고리高麗) 사람인데 원나라에 들어가 원15대 우카가투 칸(순제 1333~1370)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형 서신계徐臣桂는 육재(六宰)가 되고, 동생 응여應呂는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세력을 믿고 권력을 남용하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야사불화가 강향사(降香使)라는 직함을 받고 본국(고리)에 와서는 가는 곳마다 포악하게 굴었다. 이때
환단고기 고리국 (고려, 高麗國 本紀) 2부 7. 고리 윤관의 동북9성 1107년(예종 2) 고리 도원수 윤관(尹瓘 ?~1111)을 원수(元帥),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는 17만군이 여진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영주·웅주·복주·길주 등에 9성을 쌓았다. 두 장군이 선춘령(先春嶺=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아들 윤언이尹彦灑를 임금에게 보내 표를 올려 하례하게 하였다. 8. 동북9성을 여진에게 돌려 줌 여진이 요불褭弗과 사현史顯 등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이렇게 아뢰었다. “옛날 저희 태사(太師) 영가盈歌는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선조는 대국(고리高麗)에서 출생하였으니 자손 대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귀부함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도 역시 대국(고리高麗)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1104년 궁한리 사람들이 스스로 난리를 일으켰으나, 이는 본래 태사가 지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국조(고리高麗)에서 죄를 물어 이들을 토벌하였으나 다시 수교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 저희 늙은이와 어린아이를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환단고기 고리국 (고려, 高麗國 本紀) 1부 1. 고구리 검모잠(鉗牟岑)과 안승(安勝) 668년 고구리가 망한 후, 고구리 수임성(高句麗水臨城) 사람 대형(大兄) 모잠(牟岑=검모잠=겸모잠)은 남은 백성들을 모아 안승安勝을 받들어 후고구리왕(보덕왕 안승 669~671, 674~683)으로 삼고 신라에 원조를 청하였다. 신라왕은 나라의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했다가 뒤에 '보덕왕(報德王)'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김정명政明 681~692)은 즉위하더니 보덕왕을 거두어 소판(蘇判)으로 삼았다. 그의 조카뻘인 대문(大文)이 금마저에 머물면서 반란을 꾀하여 왕을 참칭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남은 무리들이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報德城)을 점거하고 다시 반역을 꾀하였으나 신라에게 평정되었다. 그곳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겨 살게 했다. 2. 후고구리 궁예(弓裔) 후고구리, 태봉국의 왕 궁예(泰封國王弓裔)는 그 선조가 평양사람(平壤人)으로 본디 보덕왕 안승(報德王安勝)의 먼 후예이다. 그의 아비 강(剛)은 역술인 말에 따라 어머니의 성씨를 따서 궁씨(弓氏)가 되었다. 발해 대진국 13대 명종 경황제(대현석大玄錫 872~895
다시 불붙은 환빠 논쟁? 환단고기란 무엇인가. 환웅과 단군 기록. 약 십 년에 한 번씩, 한국 역사학계는 임나일본부, 동북공정, 환빠 논란을 겪는다. 이재명 대통령이 정부 부처 업무보고에서 동북아 역사재단장에게 “환단고기를 아느냐?” 라고 질문을 했다. 이는 고조선과 그 이전의 역사에 관한 연구는 왜 전혀 없냐는 반문이기도 했다. ‘환빠’라는 용어는 단지 <환단고기>라는 책을 의미하기보다, 대한민국의 고대사, 상고사 전체를 부정하고 조롱하는 용어로 자리매김 해왔다. 우리의 역사는 곰과 호랑이의 신화로 치부되는 단군과 함께 한반도에서만 수천 년 동안 고정되어 살아왔다는 의식을 심어주었다. 1. 중국 역사와 한국 역사의 시작. 중국 역사의 시작은 약 2천년 전, ‘사마천’이 쓴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너무 오래된 책이라. 훗날 송나라 때 (집해), 당나라 때 (색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해석을 붙여 놓아서, ‘사마천’이 쓴 원래의 책보다 훨씬 많은 분량이 되었다. 그래서 기록이 진짜냐 가짜냐 진위 논란이 많은 책이지만,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정통 역사서로 인정해주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중국의 시작은 3명의 황제로부터 시작되었다.
환단고기 대진국(大震國 本紀) 2부 7. 10대 성종 선황제(대인수, 818~832) 년호: 건흥建興 타고난 모습이 영명하고 덕은 신과 같고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곧 태조(대조영)의 풍모를 지녔다. 남쪽으로는 신라를 정벌하여 니물泥勿, 철원鐵圓, 사불沙弗, 암연岩淵 등 7주州를 두고, 북은 염해鹽海, 나산羅珊, 갈사曷思, 조나藻那, 석혁錫赫 및 남북 우루虞婁를 공략하여 여러 부部를 두고, 장백산 동쪽을 안변安邊이라 하고, 압강 남쪽을 안원安遠이라 하고, 목단 동쪽을 철리鐵利라 하고, 흑수 위를 회원懷遠이라 하고, 난하의 동쪽을 장령長嶺, 장령의 동쪽을 동평東平이라 하였다. 우루虞婁는 북쪽 대개마의 남북에 있다. ※ 청나라 정사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남쪽(신라)과 북쪽으로 넓힌 땅에 용하, 회농, 길리, 삼로, 비류, 철리, 안정, 동산, 안녕 등의 군 등 군읍을 설치했다. 은주銀州는 부주富州로 바꾸고(월희 옛땅=회원부), 개주蓋州는 진주辰州로 바꾸었다. 땅의 넓이 3600km(9천리)로 영토가 크게 개척되었으며, 문치文治의 태평성대가 이어져, 위로는 나라의 도읍으로부터 밑으로는 각 주와 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9서5계(九誓五戒)를
환단고기 대진국(大震國 本紀) 1부 대진국(발해) 총 15대 259년(668~926) 세조 진국열황제震國烈皇帝(걸걸중상大乞乞仲象, 668~698) 년호: 중광(重光) 1대 태조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대조영大祚榮, 698~719) 년호: 천통(天統) 2대 광종 무황제武皇帝(대무예大武藝, 719~738) 년호: 인안(仁安) 3대 세종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대흠무大欽茂, 738~794) 년호: 대흥(大興) 4대 대원의大元義, 794 대흥(大興) 폐왕廢王, 흠무 사촌동생 5대 인종 성황제成皇帝(대화흥大華興/璵, 794~795) 년호: 중흥(中興) 흠무 손자 6대 목종 강황제康皇帝(대숭린大崇隣, 795~809) 년호: 정력(正歷) 흠무 2남 7대 의종 정황제定皇帝(대원유大元瑜, 809~812) 년호:영덕(永德) 숭린 아들 8대 강종 희황제僖皇帝(대원의大言義, 812~817) 년호: 주작(朱雀) 원유 동생 9대 철종 간황제簡皇帝(대명충大明忠, 817~818) 년호: 태시(太始) 원의 동생 10대 성종 선황제宣皇帝(대인수大仁秀, 818~832) 년호: 건흥(建興) 명충 삼촌뻘(4세조 야발이 조영의 아우) 11대 장종 장황제莊皇帝(대이진大彝震, 832~858) 년호:
민선8기 김포시가 신도시 및 북부 읍면 지역민들이 가까이 이용할 수 있는 여권민원실을 1일 개소했다. 여권업무만 단일로 처리하는 여권민원실을 개소한 것은 전국 최초로, 이번 개소로 인해 한강신도시 및 북부 읍면 시민들은 시청까지 오지 않고도 가까운 곳에서 여권업무를 해결할 수 있게 돼 원거리 이동에 따른 시민 불편이 크게 해소될 전망이다. 개소 첫날, 김포시는 김포골드라인 구래역 2층(김포한강7로 87)에서 김포한강신도시 여권민원실 현판식을 열고 정식 운영을 알렸다. 현판식 행사에는 김병수 김포시장 및 시의회 의장, 시의원, 구래동장, 지역주민 등이 함께 했으며, 특히 긴밀한 협조를 통해 여권사무 대행기관 지정 승인 및 여권민원실 개소에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외교부 윤주석 영사안전국장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김병수 김포시장은 "이번 개소로 그동안 본청에 집중됐던 여권민원이 분산되고 한강신도시 및 북부 읍·면 시민들이 좀 더 편리하게 여권업무를 이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김포시는 시민 편익을 최우선 목표로 시정을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도 실효성 있는 정책으로 시민 삶의 질이 향상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포한강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