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5 (일)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교육일반

한국 현대시 400선 이해와 감상

14.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14.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

 

                                                                        -박영희

 

 

밤은 깊이도 모르는 어둠 속으로

끊임없이 구르고 또 빠져서 갈 때

어둠 속에 낯을 가린 미풍(微風)의 한숨은

갈 바를 몰라서 애꿎은 사람의 마음만

부질없이도 미치게 흔들어 놓도다.

가장 아름답던 달님의 마음이

이 때이면 남몰래 앓고 서 있다.

 

근심스럽게도 한발 한발 걸어오르는 달님의

정맥혈(靜脈血)로 짠 면사(面絲) 속으로 나오는

병(病)든 얼굴에 말 못하는 근심의 빛이 흐를 때,

갈 바를 모르는 나의 헤매는 마음은

부질없이도 그를 사모(思慕)하도다.

가장 아름답던 나의 쓸쓸한 마음은

이 때로부터 병들기 비롯한 때이다.

 

달빛이 가장 거리낌없이 흐르는

넓은 바닷가 모래 위에다

나는 내 아픈 마음을 쉬게 하려고

조그만 병실(病室)을 만들려 하여

달빛으로 쉬지 않고 쌓고 있도다.

가장 어린애같이 빈 나의 마음은

이 때에 처음으로 무서움을 알았다.

 

한숨과 눈물과 후회와 분노로

앓는 내 마음의 임종(臨終)이 끝나려 할 때

내 병실로는 어여쁜 세 처녀가 들어오면서

― 당신의 앓는 가슴 위에 우리의 손을 대라고 달님이

우리를 보냈나이다 ―.

이 때로부터 나의 마음에 감추어 두었던

희고 흰 사랑에 피가 묻음을 알았도다.

 

나는 고마워서 그 처녀들의 이름을 물을 때

― 나는 ‘슬픔’이라 하나이다.

나는 ‘두려움’이라 하나이다.

나는 ‘안일(安逸)’이라고 부르나이다 ―.

그들의 손은 아픈 내 가슴 위에 고요히 닿도다.

이 때로부터 내 마음이 미치게 된 것이

끝없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 되었도다.

 

(『백조』 3호, 1923.9)

 

 

<이해와 감상>

 

『백조』의 ‘병적 낭만주의’는 3・1 운동의 실패로 인한 ‘민족적 좌절감’과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서구 낭만주의의 ‘세기말적 경향’, 그리고 그러한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된 ‘개인적 성향’이 3박자를 이루어 만들어진 것이다. <꿈의 나라로>, <유령의 나라>, <월광으로 짠 병실>로 대표되는 박영희의 시는 바로 그 ‘병적 낭만주의’의 실상을 보여 주는 작품들로, 온통 감상(感傷) 투성이의 현실 도피성 영탄일 뿐이다.

 

박영희는 후에 팔봉(八峰) 김기진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고 ‘감상’을 탈피한 다음, 1925년 단편 <사냥개>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로 기울어져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핵심적 지도 이론가로 변모하였다가, 결국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전향하게 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병실’은 현실적 공간으로서의 병실이 아니라, ‘달님’을 사랑하게 되면서 마음의 병을 앓게 된 시적 화자가 거처하고 있는 정신적 공간이다. 따라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화자에게 달님이 보내 준 ‘슬픔’・‘두려움’・‘안일’이라는 이름의 의인화된 정서는 그를 ‘끝없이 고치지 못하는 병’에 빠뜨리게 한 유치한 감상으로 시인의 현실 인식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알게 해 준다. 시인이 아호를 ‘회월(懷月)’로 삼은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이 작품에 각별한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의 시는 결국 ‘갈 바를 모르는 헤매는 마음’으로 ‘부질없이’ 달빛만 ‘사모하’는 ‘어린애같이’ 저급한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