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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일반

한국 현대시 400선 이해와 감상

19. 국경(國境)의 밤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19. 국경(國境)의 밤

 

                                                 -김동환

 

 

 

제 1 부

 

1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外套) 쓴 검은 순사가

왔다― 갔다―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密輸出) 마차를 띄워 놓고

밤 새 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北國)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

 

2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 나오는 듯

“어―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軍號)라고

촌민(村民)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처녀(妻女)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을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營林廠)* 산림(山林)실이 벌부(筏夫)*떼 소리언만.

 

3

마지막 가는 병자(病者)의 부르짖음 같은

애처로운 바람 소리에 싸이어

어디서 ‘땅’ 하는 소리 밤하늘을 짼다.

뒤대어 요란한 발자취 소리에

백성들은 또 무슨 변(變)이 났다고 실색하여 숨죽일 때

이 처녀(妻女)만은 강도 채 못 건넌 채 얻어 맞는 사내 일이라고

문비탈을 쓰러안고 흑흑 느껴 가며 운다.

겨울에도 한삼동(三冬), 별빛에 따라

고기잡이 얼음장 끄는 소리언만.

 

4

불이 보인다, 새빨간 불빛이

저리 강 건너

대안(對岸)벌에서는 순경들의 파수막(把守幕)*에서

옥서(玉黍)장* 태우는 빠알간 불빛이 보인다.

까아맣게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호주(胡酒)*에 취한 순경들이

월월월, 이태백(李太白)을 부르면서.

 

5

아하, 밤이 점점 어두워 간다.

국경의 밤이 저 혼자 시름없이 어두워 간다.

함박눈조차 다 내뿜은 맑은 하늘엔

별 두어 개 파래져

어미 잃은 소녀의 눈동자같이 감박거리고,

눈보라 심한 강벌에는

외아지* 백양(白楊)이

혼자 서서 바람을 걷어 안고 춤을 춘다.

아지 부러지는 소리조차

이 처녀(妻女)의 마음을 핫! 핫! 놀래 놓으면서.

 

(이하 생략)

 

* 영림창 : 산림을 관리하는 관청.

* 벌부 : 뗏목을 타고서 물건을 나르는 일꾼.

* 파수막 : 경비를 서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막사.

* 옥서장 : 옥수숫대

* 호주 : 옥수수로 담가 만든 독한 술.

* 외아지 : 외줄기로 뻗은 나뭇가지.

 

(시집 『국경의 밤』, 1925)

 

 

<이해와 감상>

 

우리 나라 신시사상(新詩史上) 최초의 서사시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은 시인 자신의 직접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다고 한다. 이 장편 서사시는 두만강 유역 국경 지대를 배경으로 하여, 일제에 쫓기어 밀수꾼이 되거나 만주나 간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불안과 참담한 현실을 향토색 짙은 민요적 표현을 빌어 노래하고 있다.

 

전 3부 72장 893행의 긴 분량이지만, 지면 관계상 5장까지 옮겨 놓은 탓으로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전체의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부 (1 - 27장) : 설이 가까운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두만강 유역의 국경 마을에서 한 여인(순이)이 소금 밀수출 마차를 끌고 강 건너로 간 남편(병남)을 걱정하고 있다. 저녁 무렵, 한 청년이 나타나 그 여인의 오두막을 두드리며 주인을 찾는다.

 

2부 (28 - 57장) : 그 청년은 여인이 어렸을 때 함께 소꿉놀이 하던 친구로, 두 사람은 차차 연정을 느끼는 관계로 발전하였으나, 재가승(在家僧)인 여진족의 후예인 순이는 다른 혈통의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부족의 관습에 따라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고, 사랑 잃은 소년은 마을을 떠난다. 그 소년이 8년 뒤에 순이 앞에 나타난 것이다.

 

3부 (58 - 72장) : 청년은 이제 남의 아내가 된 순이에게 다시 구애(求愛)의 손을 내미나, 순이는 남편에 대한 도리와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들어 이를 거절한다. 그 때, 밀수출을 나갔던 그녀의 남편은 마적들의 총을 맞고 죽은 시체가 되어 돌아온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참담한 현실과 쫓기는 자, 소외된 자의 비극적 좌절 체험을 국경 지방의 겨울밤에서 느껴지는 삼엄하고 음산한 분위기와 극적 상황 설정을 통해 제시하고자 했던 이 작품은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만큼 일제 하의 민족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못한 탓으로, 차라리 국경 지방을 배경으로 하여 펼쳐지는 세 남녀의 낭만적 사랑과 비극의 서사시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족한 역사 의식으로 인해 본격적인 서사시에는 다소 적합하지 못하더라도, 작품의 주제나 제재가 개인의 단순한 정서 표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사와 그 운명에 대해 치열한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1920년대 감상적인 낭만주의 시단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