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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일반

한국 현대시 400선 이해와 감상

20. 눈이 내리느니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20. 눈이 내리느니

 

                                                         -김동환

 

 

북국(北國)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을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히는 하아얀 북조선이 보이느니.

 

가끔가다가 당나귀 울리는 눈보라가

막북강(漠北江)* 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어다가

추위에 얼어 떠는 백의인(白衣人)의 귓불을 때리느니.

 

춥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

부득이 만류도 못하느니,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눈 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에 돌려보내느니.

 

백웅(白熊)이 울고 북랑성(北狼星)*이 눈 깜박일 때마다

제비 가는 곳 그리워하는 우리네는

서로 부등켜 안고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 얼음 벌에서 춤추느니.

 

모닥불에 비치는 이방인의 새파란 눈알을 보면서,

북국은 추워라, 이 추운 밤에도

강녘에는 밀수입 마차의 지나는 소리 들리느니,

얼음장 트는 소리에 쇠방울 소리 잠겨지면서.

 

오호, 흰 눈이 내리느니, 보오얀 흰 눈이

북새(北塞)*로 가는 이사꾼 짐짝 위에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

 

* 막북강 : 고비 사막 북쪽을 흐르는 강.

* 발귀 : ‘발구’의 함경도 사투리로 마소가 끄는 운반용 썰매.

* 북랑성 : 큰개자리별(시리우스, sirius).

* 북새 : 북쪽 국경 또는 변방.

 

(『금성』 3호, 1924.5)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김동환의 등단시로 원래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것을 시집 『국경의 밤』에 수록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손질과 함께 지금 제목으로 바뀐 것이다.

 

모진 추위와 눈보라를 뚫고 일제의 수탈을 피해 북국으로 이주하던 1920년대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튼튼한 서사 구조와 사실적 묘사를 통해 형상화시킨 이 작품은 소재면에서나 정서면에서 <국경의 밤>과 매우 흡사하다. 작품의 배경은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는 동토(凍土)이며 ‘막북강 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어다가’ ‘귓불을 때리’는 모래 바람까지 불어오는 어느 북국 마을이다.

 

조상 대대로 살던 고향을 뒤로한 채, 생존을 위해 그 곳을 찾아가는 그들의 행로는 독자로 하여금 처절한 느낌까지 갖게 만들어 준다. ‘눈 속에 파묻힌’ 산을 넘고, ‘얼음장 트는 소리’ 나는 강을 건너 얼어붙은 귓불을 매만지면서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는 유이민들은 ‘백웅이 울고 북랑성이 눈 깜박’이는 밤이면, ‘서로 부등켜 안고 적성을 손가락질’해 보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포기한지 오래일 뿐이다.

 

또한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 눈 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에 돌려보내느니.’라는 구절에서 유이민들의 안타까운 심정과 절실한 소망을 드러내고 있으나, 그 소망도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그러나 그러한 절망과 비탄 속에서 ‘제비 가는 곳 그리워하는’ 유이민들의 마음은 차츰 동병상련(同病相憐)과 같은 집단 의식으로 발전하고 ‘우리네’로 승화됨으로써 그들은 불가에 모여앉아 고향을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잠시 시름을 잊기도 한다. 고향 얘기를 안주삼아 독한 호주(胡酒)를 마시며 추위를 잊은 그들은 내친김에 한바탕 신명난 춤판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추는 춤은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마음의 상징적 의식이라기보다는 절망과 비애 속에 빠져 있는 서로를 위무(慰撫)하고 고통을 잊게 하는 행위로서, 불행한 자신들의 운명을 감내하려는 의지가 간접적으로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그러드는 모닥불 곁에 피곤한 육신을 눕힐 때, 또다시 퍼붓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오호, 흰 눈이 내리느니, 보오얀 흰 눈이 / 북새로 가는 이사꾼 짐짝 위에 /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라며 내뱉는 자조(自嘲) 섞인 영탄은 당시 유이민들의 황량하고 막막한 심경을 대변하고 있으며, ‘막북강’・‘북랑성’・‘북새’와 같은 시어를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북방 정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한편, 이국(異國)으로 이주하는 우리 민족의 애환과 민족적 이질감을 잘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