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금지된 책. 박지원의 열하일기 깜짝 놀란 고려와 신라의 대륙 흔적. 가난했던 조선 조선의 금지된 책, 금서였던 조선 박지원이 쓴 중국 베이징 방문 기록 <열하일기>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조용한 은둔의 나라 조선을 사정없이 비판했다. 병자호란 후 피폐해진 조선의 문제점을 기록한 조선 유생의 기록이다.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에 맞추어 조선에서 사신단이 파견된다. 5개월의 이동과 체류 동안 조선과 중국 땅을 다니며 박지원이 남겼던 기록. 국내에서 입을 닫는 (함구하는) <열하일기>의 숨겨진 내용을 전달한다. 1. <열하일기>란? 조선의 박지원은 44세의 나이로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70세를 축하하기 위해 조선 사절단의 일원으로 베이징과 승덕(열하)를 방문한다. 열하(熱河)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온천지역으로 베이징 우측 연경산의 승덕(承德)을 지칭한다. 북방을 지키는 요새며, 청나라 황제의 휴양지다. 연암 박지원의 호 ‘연암’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수도였던 베이징 연(燕)과 바위 산(巖)을 다녀왔다는 의미로 지었다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열하일기>는 5월 27일부터 10월 27일의 약 5개월의 기록이다.
"일본 왕은 고려, 조선의 신하입니다." 기록 1. 미국에 하와이가 있다면, 고려에는 일본 열도가 있다 고려는 북경~양자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제국이었기 때문에 일본열도는 고려에 복속하던 변방의 섬이었다. 2. 고려에 조공하듯, 조선에 조공해 온 열도의 고려 원源씨 조선에서 이성계가 건국하자 일본열도를 다스리던 고려 원源씨는 "우리는 고려에 충성했듯, 조선에 충성하겠습니다. 신하국으로 인정해 주십시오" 조공해 왔다. 조선 건국한 지 10년째인 1402년 일본열도에서 이키섬 태수 원源양희, 큐슈 태수 원源뇌수가 "조선의 신하입니다" 고백하며 조공하러 왔다. 1406년에도 조공을 했는데, 그때는 "일본의 왕 원源도희가 조공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源'씨는 '미나모토みなもと'씨 혹은 '겐지源氏'씨로 불리는데, 황족이 신하로 강등될 때 하사하던 성씨였다. 고려시대 가마쿠라 막부(겸창막부鎌倉幕府) 때 쇼군을 했던 성씨다. 3. 고려 원源씨 중심지 동경(도쿄) 동경(도쿄)에 고구려 신사가 있다(고구려=고려). 오사카, 나라 쪽은 신라 신사가 많은데 반해, 동경(도쿄)에는 고구려다. '고려산'도 있다. 이름이 '고려산'인데, 일본은 이
(1편에서 이어집니다) 22. 7월1일 장안으로 출발 오대산에서 장안까지는 서남쪽으로 2천리(800km) 길을 가야 한다. 태원, 유주, 정주, 거쳐 서안(장안)에 이른다. 좌주인 법견(法堅, 法賢)과 현량(玄亮) 스님, 원주승 광초(廣初) 등 절 안 스님들이 모두 나와 삼문(三門) 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눈물을 닦으며 서로 손을 잡고 헤어졌다. 가는 길에 오대산 남대에 들렀다. 오대산을 청량산이라고도 하여, 최초의 절이 청량사(淸凉寺)인데, 들르려 했지만 도달하지 못했다. 다섯 봉우리의 땅 500리(200km) 밖은 사면이 모두 높은 봉우리가 줄을 지어 펼쳐져 오대(五臺)를 둘러싸고 있어 1천리(400km)쯤 된다. 칼날 같은 봉우리가 줄지어 겹겹이 담장같이 둘러싼 꼴이다. 이 산에 들어오는 사람은 자연히 평등의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승려와 속인, 남자와 여자, 대인과 소인, 존귀하고 천한 사람, 어른과 아이로 나눠 보지 않고 그 곳에서는 모두 문수보살을 생각하게 된다. 7월3일 대臺에서 내려가다가 절(七佛敎誡院) 하나를 발견했다. 일본 영선 스님(靈仙和尙)이 여기 살다가 죽었는데, 발해 정소(貞素) 스님이 곡(哭)하는 시를 현판에 적어놓았더라. 7월6일
일본의 천태종 스님, 엔닌의 당나라에서 불전을 받아오러 다녀왔던 일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보면 배를 타고 중국 양자강 양주(揚州)에서 이동하여 신라 장보고가 있는 등주(登州)를 물어물어 청해의 적산(赤山)까지 가는 경로가 나온다. 신라방, 신라소에 대해 적고 있는데, 모든 역사 기록 중 신라방, 신라소에 대한 현존하는 기록은 이 책이 유일하다. 조선과 명나라가 못 없앴거든. 일본에서 보유하고 있어서.. 책에 등장하는 중국 땅에서 만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신라 사람들이었다. 당시 대륙동부가 신라 본토니까.. 대륙에는 아직도 옛 지역명 금성(金城), 월성(月城), 함산(吐含山), 팔공산(八公山) 등을 그대로 쓰고 있다. 중국 불교 성지인 구화산(青阳 九華山)에 신라 왕자 김교각스님(金喬覺 697~794)을 지장보살로 모시고 있다. 대륙이 신라 본토였음을 모든 것이 증명하고 있다. 1. 838년 6월13일 일본 출발 40대 중반 엔닌 스님은 대판 경도(오사카 교토 大阪 京都)에 있는 절의 스님이다. 6월13일 구주 복강(큐슈 후쿠오카 九州 福岡)에서 여러 대의 배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바람이 너무 불어서 3일간 기다린다. 6월17일 배를 타고 떠나 지
옛 문헌과 일상 언어, 그리고 해외 발음이 증언하는 조선이전, 우리의 대륙 왕조 고려의 정체성. 역사의 왕조를 지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왕조가 불리던 ‘이름의 주파수’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918년 왕건이 세운 나라를 ‘고려(Goryeo, 高麗) ’라고 부른다. 그러나 문헌적, 언어학적, 그리고 세계사적 증거를 입체적으로 교차 검증해 보면, 이 국가의 진짜 발음은 ‘고리(Goli)’였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우리는 이 땅을 ‘고려’로만 기억하게 되었을까? 그 이면에 숨겨진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의 왜곡 의도를 파헤쳐 본다. 1. 문헌과 일상어가 증언하는 진짜 이름, ‘고리’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조선 시대 음운학의 기준이 된 『동운정국』, 『전운옥편』, 그리고 국외 견문록인 『열하일기』에 이르기까지, 국명으로 쓰인 ‘麗’의 발음은 예외 없이 ‘리’로 기록되어 있다. 한자 발음 규칙(반절법)상 나라 이름을 표기할 때 ‘麗’를 ‘리’로 읽는 것은 고대 동아시아의 철칙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일상어 속에 남은 언어의 화석들이다. 아주 먼 옛날을 뜻하는 “고리적 이야기”, 너무 오래되어 진부함을 뜻하는 “고리타
중국 땅이 기억하는 연개소문: 북경 ‘당지산’에서 강소성 ‘몽롱보탑’까지. - 전설로 포장된 지명의 화석이 증언하는 베이징 = 고구려 평양의 실체 - 베이징 ‘당지산’과 ‘연무대’ 유적이 파헤치는 고구려 평양의 실체 중국인들 기억 속에 공포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연개소문의 경극 역사의 진실은 인위적인 공정(工程) 너머, 민초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동네 지명 속에 박제되어 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왜곡되고 지울 수 있어도, 땅이 기억하는 이름까지는 지우지 못한다. 중국 바이두(Baidu) 등 현지 자료를 추적하면 고구려의 태대대로 연개소문의 흔적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 동부 해안선을 따라 빽빽하게 분포하고 있다. 중국은 이를 '전통 설화'나 '전설'로 치부하며 역사의 선을 긋고 있지만, 그 지명들이 가리키는 논리적 정합성은 오직 '대륙 고구려' 모델에서만 온전히 설명된다. 고구려의 태대대로 연개소문. 그는 당 태종의 침략을 막아낸 민족의 영웅이자, 대륙을 호령하던 실권자였다. 그가 왜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장소들에서 나오는지 심도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선비족이 세운 당나라가 그토록 두려워한 연개소문의 고구려. 요동을 넘는다는 것은 곧 죽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고구려의 동쪽 천리장성, 고려의 동쪽 영토가 되다. 역사학자들은 고구려후기 고구려의 천리장성의 위치가 삼국사기에는 잘못 기록되었다고 한다. 천리장성의 위치는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동쪽으로 기록되고, <삼국유사>,<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에는 고구려의 서쪽으로 기록된다. 그래서 고구려의 서쪽인데, 동쪽으로 오기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대로 동쪽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교과서 고구려 천리장성은 고구려가 당나라가 아니라 신라를 막기위하여 쌓은 성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12년(629) 가을 8월에 신라 장군 김유신이 와서 고구려 동쪽 변경을 침범하고 낭비성(娘臂城)을 격파하였다. 고구려의 동쪽을 침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도 오기 일까? 필자는 천리장성의 위치를 베이징 우측, 현재 요녕성의 긴 장성으로 해석한다. 교과서의 고구려영토는 고구려 영토가 후에 신라가 강성하면서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고려의 동계가 된것이다. <삼국사기> 14년(631) 봄 2월에 고구려의 왕이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장성(長城)을
(1편에 이어서 계속) 11. 645년(개화4) 당나라 이세민의 침략전쟁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내용을 중심으로 당나라 이세민(당태종)의 고구려 침입과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대응을 살펴보자. 644년(개화3) 11월 당나라 당태종 이세민은 당나라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고구려 평양도행군 대총사령관으로 삼아 4만명을 거느리고 평양(현 안평)으로 가게 하고, 당나라 방효태는 4만명을 거느리고 물길로 떠나게 하였다. 또 당나라 이세적(李世勣=이적)을 요동도행군 대총사령관으로 삼아 6만명을 거느리고 요동(현 좌권현)으로 가게 했다. 장량의 부대와 유주(幽州)에서 합류케 하였다. 당나라 당태종 이세민은 친위군 20만명을 거느리고 뒤따른다. 연개소문은 건안·안시성 등 몇몇 성만 지키고 나머지는 곡식과 사료를 치우거나 불태워, 적이 약탈할 것이 없게 하였다. 고구려 오골성(烏骨城)을 방어선으로 삼고 용맹한 장수와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였다. 고구려 안시성주 양만춘과 고구려 오골성주 추정국에게는 별도로 은밀한 계책을 내렸다. “당나라 군은 군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말·양을 많이 가져왔으나 겨울에 무엇으로 짐승들을 먹이겠소? 그러니 속전속결로 나와 안시성을 먼저
베이징을 휘어잡은 고구려 연개소문, 당태종을 떨게하다 1 1. 어릴 적 고구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淵)씨요, 그의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이다. 아버지=태조太祚, 할아버지=자유子遊, 증조부=광廣으로,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지냈다. 603년(홍무14) 5월 10일 서부 대인이자 대대로인 연태조太祚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이 9살(611년)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풍채가 우람하고 기개가 빼어났다. 늘 자신의 군사들과 함께 숲에 누워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 무리와 잘 어울리면서도 최선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포상을 받으면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살폈으며, 마음을 미루어 이해하고 참아두는 아량이 있다. 땅을 씨줄緯로 하고 하늘을 날줄經로 하는 재주에 사람들은 모두 감복하여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판단하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어려움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람들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우리는 동이족인가,, 동이 민족인가? 동이족은 어디 살던 민족인지, 영토에 대해 설명을 들어본적이 있을까? 중국은 동서남북의 이민족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 불렀다. 동이는 삼국과 고려, 북적은 발해, 서이는 강족, 남만은 묘족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이는 큰 활을 든 사람이라고 해석된다. 전세계 민족중 유일하게 공동체를 강조하는 '우리'라는 표현을 쓰는 민족. 우리와 동이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우는 오른쪽, 동은 오른쪽으로 같은 뜻이다. 1. 동이가 고려와 삼국이라고 ? 중국 당나라 역사서 <구당서>에는 동이민족을 5개로 규정하고 있다. 동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국 그리고 일본이다. 일본은 왜의 별도 종족으로 백제패망 후 새로 건국된 국가다. <구당서>에는 왜국의 설명과 일본의 설명이 별도로 달리 기술된다. 대한민국 보물 <고려사>에는 여러번 고려가 동이의 땅에 있으며, 동이민족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명나라 역시 고려를 동이로 호칭하고 있다. 산과 황하, 강 즉 해(海)가 있는 곳에 살던 동이 민족이다. 2. 현재 중국이 해석하는 동이의 중심지는 어디일까? 중국의 고대 하나라의 우공이 9주라 말한 동이지역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