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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황희 칼럼> 화석화 된 인식과 미분화 된 사고의 편견이 갖는 무지를 신념화 하는 것은 재앙이다.

농경사회에서 태어나 산업화 시대에 교육을 받으며, 민주화 시대에 청춘을 바치고 정보화시대에 퇴물이 된 시대의 동지들에게 바치는 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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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책례-娼家責禮, 도문계살-屠門戒殺]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떠도는 ‘신-사단논쟁(新-四端論爭)’이란 것이 있다. 이는 고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 논쟁’을 패러디한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고을에 ‘4×7=27’이라고 주장하는 사내와 ‘4×7=28’이라고 주장하는 사내가 서로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우기다가 급기야는 싸움이 벌어졌다. 마침내 두 사내는 고을 원님을 찾아가 시비를 가리고자 하였다. 사연을 전해 들은 고을 원님은 ‘4×7=27’이라고 주장하는 사내를 풀어주라 명하고, ‘4×7=28’이라고 주장하는 사내에게는 곤장 열 대를 치라 명하였다.

 

도저히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4×7=28’ 사내가 원님에게 따져 묻자, 원님이 말하기를 “아니 이 사람아! 도대체 ‘4×7=27’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멍청한 놈과 끝끝내 싸우는 사람이 더 멍청한 놈이지, 자네를 벌하지 않으면 누구를 벌하겠는가?” 하였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대체로 ‘지연’이나 ‘학연’ 등의 공동체적 관계를 매개로 친구 관계가 형성된다. 감성의 촉이 가장 왕성한 청춘의 시절에 서로 대가 없이 만나, 상대의 인격에 감응하기보다는 소위 분위기에 꽂혀 쉽게 친구가 된다.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시간과 공간을 서로에게 제공하며 일정 부분 비밀을 공유한 채 친밀도를 더해간다. 철없던 시절 자신이 맺은 이 인간관계가 평생의 우정일 것이라고 그 시절 나는 속절없이 단정하였다.

 

천명(天命)을 알고 귀가 순해질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추억’을 공유한다고 해서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가치’가 공유될 때에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의 첫째 조건은 ‘가치의 공유’이고 둘째 조건은 서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이 담보되는 관계여야 한다. 가장 불행한 친구의 조건은 추억을 담보로 의리를 구걸하며 서로에게 ‘반면교사’가 되는 것이다.

 

기억 저편에 남아 있던 오랜 친구를 만나던 날. 안목의 빈곤 속에서 착시하였던 허상들을 왜곡된 기억으로 추억해왔던 나의 몽상이 얼마나 허망한 환상이었는지를 처절히 깨달았다.

“고독이란 잠시 방문하기에는 좋은 장소이지만, 오래 머무르기에는 매우 쓸쓸한 곳이다.”라고 하였던 버나드쇼의 말처럼 추억이란 것도 기억 속에 머물러 있을 때 아름다운 것이지, 굳이 현실로 소환해 내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왜곡된 인지 부조화의 망상이었음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소위 사회학에서 말하는 ‘합성의 오류’라는 것 말이다. ‘개별적 부분으로는 참이지만 그 부분들의 결합이 반드시 참일 수 없다’라는 명제 말이다. 단편적 기억으로 남았던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실체적 존재로 현실에서 마주하였을 때, 반드시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일정 시간 기억의 지분이 있었다고 해서 서로에게 지분 이상으로 많은 공백이 있었음을 망각한 채, 추억을 담보로 현재 상대의 인격이나 가치를 함부로 규율하거나 재단해서는 매우 곤란하다.

스무 살 청년 때의 기백과 의기의 투합이 매우 가상하고 순수하기는 하나 일생을 그런 기분과 치기 어린 낭만으로 산다면 그것은 매우 불행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현실의 세계는 순정만화와 같은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과거 자신의 경험에만 안주한 채, 사상과 인격이 성장하지 못하여 스스로 안목의 빈곤을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높이에서 자신의 소견에 좋은대로 세상 모든 것을 재단하고 규율하려 든다면 이는 독단의 도그마에 빠진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역사와 자신을 객관화시키려는 일체의 노력조차 없이 사물을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보이는 대로 믿으며 자신의 인식을 정당화하려는 그의 고집 앞에 ‘상식’과 ‘예의’를 설득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은 참으로 허망하였다.

 

농경사회에서 태어나 산업화 시대에 교육을 받으며, 민주화 시대에 청춘을 바치고 정보화시대에 퇴물이 된 시대의 동지가 아니었던가? 명색이 사대문 안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유신의 독재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겪었던 동시대의 전우라 여겼던 그들에게서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윤석열의 공정을 전해 듣게 되리라곤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하였다. 우연한 기회에 참석하게 된 동창 모임에서 나는 맹수 앞에 홀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화석화된 인식과 미분화된 사고의 편견이 갖는 그들의 무지는 재앙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내 취향에 맞으면 선이요, 내 기분에 맞지 않으며 악’으로 규정하는 그 단순 무식이 참으로 경악스러웠다. 편협한 시야의 틀 안에서 대롱으로 세상을 보려는 옹졸한 시각과 자신이 겪은 경험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그 옹고집에 아연실색할 뿐이었다.

 

인생에는 변하지 않을 것도 있어야 하는 반면,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해야 할 것도 있다. 흔히 ‘궁즉통(窮則通)’이라 한다. 주역에서는 “궁즉변(窮則變)이요 변즉통(變則通)이요, 통즉구(通則久)요 구즉궁(久則窮)”이라 말한다. 인생은 누구도 이 변화와 순환의 사이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므로 ‘구(久)’하면 결국 ‘궁(窮)’에 이르고 ‘궁(窮)’하면 다시 ‘변(變)’해야 하지 않겠는가?

누가 말했던가? ‘포도주와 친구는 빈테이지가 중요하다’고, ‘일리(一理)’가 있을지는 몰라도 결단코 ‘진리(眞理)’나 ‘천리(天理)’가 될 수는 없는 소리이다. “백두여신, 경개여고(白頭如新, 傾盖如故)”란 말도 있지 않은가?

 

하루를 만나도 십 년을 만난 것 같은 지기가 있을 수 있고 십 년을 만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빈궁할 때 사귄 친구는 잊어서는 안 된다(貧淺之交不可忘)”라는 말을 반드시 금과옥조로 삼을 일만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술은 지기를 만나면 천 잔도 적고, 말은 뜻에 맞지 않으면 한마디도 많다(酒逢知己千鍾少, 話不投機一句多.)”라고 하였는데, 추억 속의 인간을 현실에서 만나고 나니 ‘창기의 집 앞에서 예를 책망’하고, ‘도살장 앞에서 살생을 경계’하는 것만 같은 면벽 불통의 심정으로 그저 참담하였다.

막걸리가 깨고 나서야 밤새 '미분' '적분'을 함께 논쟁하였던 친구가 구구단조차 못 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비로소 ‘신-사단논쟁(新-四端論爭)’에 휘말렸던 나의 어리석음을 크게 후회하였다.

 

지난날 자신을 자학하고 스스로 싸구려로 살아왔던 나의 삶이 명백하게 반증된 셈이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분노 때문에 스스로를 용서하기가 매우 힘겨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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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환 기자

시공간 속의 여러 사건과 사고들은 누군가의 매체에서 전달 된다. 그러나 과연 여러 사슬망과 얽혀 있는 기존 매체의 보도 현실에서 정론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임뉴스는 이 논점에서 부터 시작하는 SNS 매체로서 인터넷 언론 리딩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