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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황희 칼럼> 정구불식 - 鼎狗不食

개를 사랑하고 동물을 애호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자신은 선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동물 사랑'과 '정의'를 동일시하는 편견에 찬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동파의 시에 “새는 갇혀 있어도 날 것을 잊지 않으며, 말은 메어 있어도 항상 달릴 것을 생각한다[鳥囚不忘飛, 馬繫常念馳]” 하였다. 새의 본성은 나는 데 있다. 새를 사랑한다면서 새를 새장에 가두어 놓고 보고 즐기는 행위는 새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본성을 파괴당하는 잔인한 고문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농락(籠絡)’이란 것이다. 새는 인간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동물을 동물원에 가두어 놓고 관람하는 행위는 동물을 감옥에 구속시켜 놓은 채 그들의 부자유한 모습을 즐기는 행위와 똑같다. 진정으로 동물을 사랑한다면 인간이 자연을 찾아서 그들의 삶을 관찰하는 것이 옳다.

 

요즘 개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주변에 넘쳐난다. 그분들께는 매우 죄송한 말이지만 개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사랑의 대상은 오직 ‘사람’과 ‘하느님(神)’일 뿐이다.

‘애완견(愛玩犬)’이라 할 때의 ‘愛’자는 사랑의 의미가 아닌 ‘아낄 애’자이다. ‘愛玩’은 아끼고 즐긴다는 의미이다. 개의 털을 깎고 머리에 장식을 하며, 조끼를 입히고 성대를 수술하는 등의 행위는 개의 입장에 있어서는 학대를 당하는 고문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개는 옷을 원하지 않았으며,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을 수 있는 구강구조를 갖고 태어났다.

 

개를 치료하고 목욕시키며 유지 보수(?)하는데, 한 달에 몇백만 원을 쓴다는 사람을 보았다. 백만 원만으로도 4인 가족이 한 달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난한 이웃이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얼마든지 있다. 신의 입장으로 본다면 이웃사랑을 외면하고 동물을 사랑한 그는 명백히 신에게 범죄행위를 한 셈이다.

 

언젠가 한밤중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호랑이만 한 개가 걸어 나와 기겁을 하고 뒤로 나자빠진 적이 있다. 식겁을 하고 놀란 나를 아무렇지 않게 조롱하듯 비웃고 지나가는 그 견주의 뒤통수를 향해 총이 있으면 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어린 시절에 개에 물린 경험이 있는 나와 태생적으로 개를 무서워하는 아내는 유감스럽게도 개를 매우 싫어한다. 호수공원 바로 곁에 살면서도 산책 한 번 못 나가는 것은 공원을 이미 개가 점령했기 때문이다.

 

치매 어머니를 찾는다는 전단은 못 보았어도 애완견을 애타게 찾는다는 전단은 게시판에 심심찮게 본다. 개 소음으로 인한 민원과 분쟁이 끊이지 않음에도 비좁은 공동주택에서 개를 키우는 개념 없는 견주들의 비상식은 이미 도를 넘었다.

 

자신의 개를 아끼고 사랑하는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타인에게 혐오나 불편을 주지 않으려는 노력을 선행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개념 없는 견주들에게 일정한 교육을 수료하고 라이센스를 발급해주는 제도를 마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기우인 걸까?

 

개를 사랑하고 동물을 애호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자신은 선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동물 사랑'과 '정의'를 동일시하는 편견에 찬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대체로 이런 인생들은 개를 식용하는 사람을 매우 미개하고 저급한 인류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해하지 마시라. 우리 선조들도 키우던 개를 함부로 잡아먹지는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가 지은 『부인필지(婦人必知)』에 “정월에는 개를 먹지 않고, 이월에는 말을 먹지 않는다[正狗不食, 二馬不食]”라고 하는 제주도의 풍습을 소개하는 글이 있다.

뿐만이 아니라 동음이의어인 ‘정구불식(鼎狗不食)’은 ‘한솥밥 먹는 개는 잡아먹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쓰였으며, 또 다른 ‘정구불식(情狗不食)’은 ‘정든 개는 잡아먹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고문서에는 이와 유사한 의미의 사례들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가난한 농경사회의 선조들조차도 식용과 애완의 의미는 가릴 줄 아는 안목을 가졌었다는 증거이다.

 

산 낙지를 펄펄 끓는 물에 생으로 집어넣어 삶아 먹기도 하고, 살아있는 물고기를 난도질해 회를 떠서 먹기도 하는 인생들이 왜 유독 개 만큼은 필요 이상으로 집착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정구(鼎狗)’나 ‘정구(情狗)’가 아닌 가축을 식용한다는데 말이다.

 

개의 식용을 혐오한다는 안면 변장의 귀재 ‘김 여사’께서 자신은 동물존중에 대한 사명이 있다면서 “동물을 존중하는 마음이 학대받는 어린이, 소외된 여성 등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적 관심으로 확장돼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 뉴스를 보고 나는 그야말로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녀에게 '국민'은 '동물'과 동급의 부류인 셈이었다.

 

유학에서는 사랑에 차등을 두었다. ‘가족을 친애하고서 사람을 인으로서 대하며, 사람을 인으로 대하고서 사물을 아끼는 것이다.’[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 라고 하는 것이 유학이 주장하는 사랑의 본령이다. 유가의 사랑은 먼저 가족에게 집중된다. 그 다음에 이웃과 지역 공동체로 확장되고 여유가 있을 때 동식물까지로 그 사랑을 넓혀간다.

 

사랑의 깊이는 ‘親(친애) > 仁(어짐) > 愛(아낌)’으로 낮아지지만, 사랑의 범위는 ‘親(가족) < 民(사람) < 物(사물)’로 넓혀간다. 이것을 ‘방법적 차등의 사랑’이라 한다.

표절과 변신술의 대가이신 ‘김 여사’께서는 동물존중에 대한 사명을 인간보다 우선하여 동물을 존중하는 마음을 확장하여 ‘어린이’와 ‘여성’ 그리고 ‘사회적 소외계층’으로까지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먼저 사람을 사랑하고 남는 힘으로 동물을 존중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존중하는 그 마음으로 사회의 취약 계층을 대하겠다는 것이다. 당신의 부모도 개를 존중하는 그 마음으로 개를 대하듯 부모를 대하는지 묻고 싶다. 아무리 애완견을 반려견으로 인식하는 세상이 되었다 한들, 개와 사람에 대한 존중을 동격으로 대우한다니 그녀의 의식 수준이 매우 저열하다.

 

‘반려견’이라는 의미조차도 맹인이나 독거노인들이 그들의 생활의 편리를 위해 함께 데리고 다녔던 데서 유래하였던 것이지, 개가 인생의 목표와 목적을 공유하는 존재는 아니란 것이다.

옛 선현들은 “백성을 보기를 자기의 상처를 보듯 하라[視民如傷]”고 하여 백성을 지극한 마음으로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한갓 동물을 애완하는 유희의 마음으로 사회의 취약 계층에게 관심을 가지겠다는 것은 매우 교만하고 위험한 발상이다.

‘동물존중’을 인간보다 우선시하는 그녀의 시각에서 국민을 애완용 개돼지쯤으로 여기는 그녀의 잠재의식을 엿보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언짢고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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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환 기자

시공간 속의 여러 사건과 사고들은 누군가의 매체에서 전달 된다. 그러나 과연 여러 사슬망과 얽혀 있는 기존 매체의 보도 현실에서 정론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임뉴스는 이 논점에서 부터 시작하는 SNS 매체로서 인터넷 언론 리딩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