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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가식서가숙 - 東家食西家宿]
오늘날 ‘동가식서가숙’이라 하면 일정한 직업이나 거처 없이 남의 신세에 기대어 사는 궁색한 형편이나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대표적 백과사전인《태평어람(太平御覽)》이나 《예문유취(藝文類聚)》 등에 의하면 이 고사의 유래는 지금의 뜻과는 내용이 사뭇 다르다.
산동성의 옛 지명인 제(齊)나라에 한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두 집안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동쪽 집 아들은 인물은 볼 것이 없었으나 집안이 매우 부유했고, 서쪽 집 아들은 인물은 미남이었으나 집안이 매우 가난했다.
인물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부를 선택할 것인가? 부모는 딸의 뜻을 묻기 위해 “만일 동쪽 집으로 시집을 가고 싶으면 왼쪽 소매를 걷고 서쪽 집으로 시집을 가고 싶으면 오른쪽 소매를 걷어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딸은 한꺼번에 두 소매[양단-兩袒]를 모두 걷었다. 부모가 놀라 그 연유를 묻자 “낮에는 동쪽 집에서 먹고 밤에는 서쪽 집에서 자고 싶어요.” 하였단다.
효종의 사위였던 정재륜이 쓴 《한거만록(閑居漫錄)》에는 이런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가 조정에서 재신(宰臣)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 한때는 고려왕조에 충성을 맹세했던 자들이었지만, 새로운 정권에 동조하며 지위를 약속받은 사람들이었다. 그 연회에 설중매(雪中梅)라는 기생이 있었다. 그녀는 송도의 이름난 기생으로 미모와 재기(才技)가 뛰어나 뭇 사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어떤 늙은 정승이 술에 취해 설중매에게 치근대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아침에는 동가식(東家食)하고 저녁에는 서가숙(西家宿)하는 기생이니 오늘 밤에는 이 늙은이의 수청을 드는 것이 어떠하냐?”
그러자 설중매가 대답하였다.
“소첩은 동가식서가숙하는 천한 기생이온데, 어제는 왕 씨를 모시다가 오늘은 이 씨를 모시는 정승 어른 같은 분을 모시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늙은 정승은 얼굴이 벌게져서 고개를 들지 못하였고 좌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탄식하였으며, 어떤 대신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한다.
《소학(小學)》에 이런 말이 있다. “혼인에 재물을 논하는 것은 야만족의 풍속이다. 군자는 그런 고장에 들어가지 않는다. 옛날에 남녀의 집안은 각각 ‘덕’을 택했지 ‘재물’로 예를 삼지 않았다.”
[婚娶而論財, 夷虜之道也. 君子不入其鄉. 古者男女之族, 各擇德焉, 不以財爲禮.]
결혼의 조건이 사랑이 전제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욕망과 탐욕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되고 만다면 이는 피차간에 매우 불행한 일이다. 정치인이 정당을 선택하거나 정치를 하는 행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정치의 도리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국민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봉사’가 되어야지 자신의 생계와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명예와 치부로서의 ‘수단’이 되어서는 매우 곤란한 일이다. 이는 본인과 주권자를 모두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다.
속칭 ‘수박’이라 불리며 정체성에 의심을 받는 일군의 ‘생계형 직업정치인’들의 철새도래지가 되어 버린 민주당에는 요즈음 ‘조식동가(朝食東家) 모숙서가(暮宿西家)’하는 ‘양단(兩袒)’들로 넘쳐나고 있다.
당의 대권 주자였던 동지에 대한 탄압을 보호하지는 못할지언정 ‘사법 리스크’운운하며 기정사실인 양 낙인찍기를 시도하고, 당이야 어떻게 되든 오직 자신들만의 권력 유지를 위해 내부총질로 해당 행위를 일삼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협치를 빙자하면서 뒤로는 적과 야합하고 내통하며 구태를 답습하는 행태를 보자니 저들의 개혁 의지에 회의가 들고 정치를 직업 삼고자 하는 욕망이 혐오스럽다.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조국의 강’이라는 마녀사냥식 희생제물도 마다하지 않는 위인들이 바로 ‘양단(兩袒)’이요 ‘세작(細作)’이다. 과연 그들이 동지의 피 값을 팔아 경찰국장이 된 프락치 인사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당내 다품종수박의 일종인 ‘양단’과 ‘세작’들이 ‘프락치’ 경찰국장과 과연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일신의 영화와 권력 지향의 욕망뿐인 저들의 양심이 프락치 국장과 무슨 변별과 차이가 있더란 말인가?
더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우리 역사에는 남로당원을 밀고한 대가로 사형수에서 극적으로 부활하여 구테타로 정권을 잡았던 정치군인이 있었는가 하면 독립군을 탄압하던 일제의 주구(走狗)가 해방정국에서는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정권의 주요보직을 꿰차고 민주인사를 탄압하였던 어처구니없는 사례가 무수히도 많다. 이 청산되지 못한 민족의 원죄 때문에 숱한 변절과 배신이 난무하는 곳이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이다.
그들에게 국민은 언제나 정치의 ‘목적’이 아닌 ‘수단’이며 ‘방편’에 불과하였다. 이런 정치인이 암약하며 기생하도록 맹목적 지지를 보내는 이 시대의 자발적 노예들 또한 역사를 퇴행하게 하는 독초의 씨앗일 뿐이다.
단테의 신곡에 의하면 지옥의 가장 마지막 단계인 제9옥 ‘루시퍼의 연못’에는 동생을 죽인 ‘카인’을 비롯해서 예수를 판 ‘가룟 유다’와 시저를 암살한 ‘브루투스’ 등이 있다고 한다. 이곳은 친구나 동료를 배반했던 자들이 벌을 받는 곳이다. 조국과 동지를 배반한 대가가 어떠한 것인지 오늘날 수박 정치인으로 불리는 ‘양단’과 ‘세작’ 그리고 권력의 ‘프락치’들은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적어도 진보를 표방하는 양식 있는 정치인이라면 간을 빼놓고 다닐 수 있는 별주부가 아닌 바에야 ‘느린 토끼’나 ‘빠른 거북이’로 살 수는 있어도 ‘빨간 청개구리’가 되어 살아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