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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를 다시 품다. 1
'의정부'라는 도시의 명칭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어떤 역사적 내용을 품고 있기에 조선시대 행정기관의 이름을 도시의 이름으로 쓰게 된 것일까?
참으로 궁금해 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의정부라는 도시 명(名)에는 숨어 있습니다.
의정부에 사시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내용은 보통 이렇습니다.
조선조 1400년 2차 왕자의 난 이후 방원은 제 3대 태종이 되었으나 태조(이성계)는 감정을 참지 못해 고향인 함흥으로 간다. 이에 태종은 여러 차사를 보냈지만, 부왕인 태조도, 차사와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부터 함흥차사란 말이 생김) 이후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태조는 환궁을 하게 되고 태종은 지금의 호원동 전좌 마을까지 나와 부왕 태조의 환궁 환영 준비를 하는 가운데 신하의 의견으로 아름드리 나무로 고주 기둥을 세우는데 때마침 도착한 부왕 태조는 태종에 대한 노기가 충천하여 활궁에 철전을 매어 잡아 당겼으나 살은 연대에 꽂히고 태종은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 때부터 "연대가 맞아야 산다."라는 말이 생기게 됨)
-의정부애향회 카페 글 부분 인용 |
그래서 의정부에 사는 사람들은 자부심이 나름 대단하죠.
함흥차사 이후 두 왕이 최초로 화해한 땅.
삼정승이 태상왕 이성계에게 옥새 도장 받으러 와야 했던 지역.
그래서 삼정승들이 속한 행정기관이 도시 명으로 사용되는 역사 깊은 도시(都市).
이거 정말 나름 어깨 으쓱해지는 내용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위의 내용들은 사실일까?
사료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꽝 납니다. 꽝.
“사실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니까요.
일단 ‘함흥차사 이후 두 왕이 최초로 화해한 땅.’은 맞는가?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명확하게 실록(實錄)에 아래와 같이 적혀 있으니 이건 빼박인 거죠.
上出金郊驛, 迎太上王入帳殿獻壽 임금이 금교역(金郊驛: 황해도 금천)에 나가서 태상왕을 맞이하고, 장전(帳殿)으로 들어가서 헌 수(獻壽)하였다.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1402년) 12월 8일 (정사 2번 째기사 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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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의 내용이 이렇다보니 사료를 중시하는 학자들은 의정부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하는 논쟁에 돌입합니다.
왜냐? 의정부에서 두 임금이 최초로 화해하지 않았다면 의정부라는 지명은 왕과 전혀 상관없는 지명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 두 명의 임금과 상관이 있다면 그 시절 어딘가에는 흔적이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학자님들은 누가 더 오래된 사료를 찾아내느냐에 몰두했고, 그 증거라고 여러 가지를 제시하기에 이릅니다.
한덕조 기자의 글부터 살펴볼까요?
1796년(정조 20) 승정원일기에 「楊州 直谷(곧은골)坪[평-들]과 議政府坪으로 달려가 農事을 살폈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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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이 발표가 되니까 홍정덕 신한대 교수이자 향토사학자로 알려진 분이, 무슨 소리냐? ‘그것보다 더 오래된 사료가 있다.’ 하면서 아래와 같은 글을 제시하죠.
'30리를 가서 누원점에 도착했는데 이성 형이 쉬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성 형과 함께 하니 먼 길 떠나는 마음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십리를 더 가서 의정부점에 도착하였는데 이성 형은 서오랑점으로 바로 가고 나는 역을 찾아 다시 십리를 가서 녹양역에 묵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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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조 11년 그러니까 서기 1787년에 함경도 군관으로 부임하러가는 노상추라는 사람의 일기 내용 중 일부분인데요. 한덕조 기자가 제시한 자료보다 9년 정도 앞 선 자료가 제시된 겁니다.
일기 속의 의정부(義正部)는 지금의 의정부(議政府)와 한문이 다르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의정부라는 지명이 등장한 사료로는 현재 최초라는 단어를 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분들의 사료는, 의정부라는 지명은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 두 임금들의 역사와 상관이 없는 지명이라는 결론을 도출 시키는 증빙자료가 되는 겁니다.
조선 개국 초부터 의정부라는 말이 시작된 게 아니라는 것이고, 그렇기에 두 임금의 역사와 연관시키면 안 된다는 논리인 거죠.
일이 이렇게 진행되면 새롭게 등장하는 분들이 계시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지명을 언어로 해석하시는 분들도 의정부 지명 유래에 대하여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 분들이 나서면 뭐가 좀 달라질까? 아닙니다. 이 분들이 나서도 의정부 시민들에게는 또 다른 꽝이 준비됩니다.
언어로 지명을 해체하다보면 역사와 그 지역 백성들의 염원은 사라지고 오직 글자에 의한 해석만 남게 되면서 생선 가시만 앙상하게 남은 처량한 모습이 접시 위에 올려 지게 된다는 거.
발곡초등학교 옆이 본둔야(本芚夜)이고, 그 뒤로 해서 영석고, 306보충대, 솔뫼중까지가 둔야(芚夜)면입니다. 이 둔야면의 옛 이름은 ‘둔배미’라고 한문(芚)과 순우리말(배미)이 반씩 합쳐진 모양으로 불렸었죠. '둔야(芚夜)' '둔배미'란 과연 어떤 뜻일까요? '둔야(芚夜)' '둔배미'는 '주둔(芚)한 군대가 경작하는 논배미'라는 뜻으로 ‘屯田·屯土’는 본래 '軍用 경작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정부에는 정부기관 ‘議政府’가 경작하는 ‘衙門屯 (아문둔)’이 있었고, 그 '議政府가 경작하는 衙門의 屯을 가리키는 말‘이 줄어 '議政府'라는 지명으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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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되었든 지명으로 해석한 내용을 한번 볼까요?
아. 의정부(議政府)라는 행정기관에 공납을 하던 지역이기 때문에 의정부(議政府)라는 지명(地名)이 사용되었다는 이야기군요.
더 이상 발라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살이라고는 찾아보려고 해야 찾아볼 길이 없는 해석이 의정부 시민들의 밥상 위에 올라지게 되는 순간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런 거죠. 임금의 역사는 잊어라. 삼정승이 왔다 갔다 했다는 것도 뻥이다. 너희 동네는 의정부(議政府)라는 행정기관에 공납하던 흙수저 변두리 마을이니까.
아~. 이렇게 되면
교육의 변방이요, 문화의 변방이요, 경제의 변방이지만 그래도 왕과 연결된 역사가 있는 도시라는 생각에 뼈를 묻어보려고 했는데 그것조차 아니라니 실망이라는 슬픈 감정이 쓰나미를 타고 밀려옵니다 그려. 흑.
참. 학자님들 모지십니다. 그려. 의정부 사람들 꽝 난 가슴 총 맞은 것처럼 부둥켜안고 고통스럽게 살아 가야겠습니껴?
그러나 신박신박 신동명 박사가 누굽니까. 의정부 토박이. 태어나서 초, 중, 고를 나오고 대학도 버스타고 다니면서 서울로 출퇴근 했던 그래서 의정부를 단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는 60년 풀 거주 인생 아닙니까?
자! 그럼 지금부터 슬슬 의정부 토박이로서 의정부에 자부심 회복시키는 작업을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정부가 ‘함흥차사 이후 두 왕이 최초로 화해한 땅.’이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는 쿨하게 인정.
그럼 삼정승들은 ‘의정부에 옥새도장 받으러 왔을까요? 안 왔을까요?’
네. 그건 ‘왔습니다.’ 이 상황에 대하여는 학자님들, 어원 해석하시는 분들 인정하시죠? 이건 분명히 인정입니다.
이 글을 읽는 양주, 동두천 분들은 자기네 동네에서 주로 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 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와 동두천 소요산(逍遙山) 별궁에서 주로 했다는 거 그것도 쿨하게 인정.
그런데 의정부 호원동 전좌마을 안 쪽, 당시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는 회룡사에서는 옥새 도장을 안 찍었다는 건지요? 그리고 양주 동두천으로 도장 받으러 가려면 삼정승들이 의정부 다락원이나 장수원에 1박 했을 건데 이것도 부정하실 건지요?
인정하시죠! 의정부 사람들 쿨하게 인정하는 거 보셨죠? 그러면 여러분들도 인정할 건 쿨하게 인정하셔야 하는 겁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영의정·좌의정·우의정’들이 옥새 도장을 받으러 의정부에 방문 하거나, 옥새 도장을 받으러 양주 동두천을 가기 위해 의정부에서 숙박을 하며 거쳐 갔다면, 당시에 의정부라고 불렀을 확률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저는 단언하지만 충분히 있고도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의정부 삼정승들이 잠만 자고 가도 의정부라는 지명이 만들어질 수 있는 건데, 하물며 태조 이성계의 옥새 도장을 받으러 왔다? 그렇다면 더욱 의정부라는 행정기관을 지명으로 사용하고도 남을 일 아닙니까!
더불어 사료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의 해석에 의문인 것은 노상추의 일기에 나와야만 그때부터 의정부라는 말이 시작되는 겁니까? 어떤 사료에 글이 언급이 되어야 그 말이 시작되는 거냐 이 말입니다.
언어라는 것이 누가 일기에 쓴 게 촉발이 되어서 지명이 되는 경우는 몇 %일까요?
아마도 대추나무 밑에 있다가 번개 맞아 사망한 사람의 확률보다도 더 적을 겁니다.
오히려 언어(말)가 수없이 사용된 이후 비로소 글로 정착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해석이 아닐까요?
1796년(정조 20) 승정원일기에도 의정부평(議政府坪)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걸 보면 정조 대왕 때 본격적으로 의정부라는 말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건데, 그럼 그 이전부터 상당히 오랜 기간 민가(民家)에 구전(口傳)되었다가 마침내 글로 정착되었다고 미루어 짐작하는 태도가 올바른 태도로 보여집니다. 적어도 제가 볼 때는.
그럼 언제부터냐? 저는 노상추 일기가 쓰였던 1787년 훨씬 이전 한 300년 전인 1405년 쯤 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의정부라는 지명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제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바로 이것입니다.
戊戌/上迎太上王于古見州。 上詣宿所獻壽, 太上王從容謂曰: "兩都來往, 民不安業。 自今其能定居乎?" 上曰: "謹奉敎。" 仍陪宿。 임금이 태상왕을 옛 견주(見州: 백제 때 매성군 또는 마홀이라고 불렸던 곳. 의정부의 옛 이름임)에서 맞이하였다. 임금이 숙소에 나아가 헌수하니, 태상왕이 조용히 이르기를, "양도에 내왕하여 백성들이 생업을 편히 하지 못하였는데, 이제부터는 정해 살 수 있겠는가?"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하고, 이내 모시고 잤다. 태종 10권, 5년(1405 을유 / 명 영락(永樂) 3년) 11월 6일(무술) 1번 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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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황해도 금천 금교역에서 최초의 화해 자리가 끝나고, 3년 뒤에 의정부에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재회했다는 실록(實錄)의 내용인 건데요. 거기에 다음 해에도 의정부에서 화합의 자리가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실록(實錄)에 또 등장하는군요. 아. 이렇게 되면 제 주장의 근거가 매우 단단해진다는 느낌이...
辛酉/上出次楊州南郊, 候太上之還也。 太上次楊州客舍, 上謁見, 進酒極歡。 暮, 還南郊帳殿。 翼日, 太上王曉發, 次于海村之郊, 上隨至進酒, 退次于川邊行殿 임금이 양주(楊州) 남교(南郊: 의정부의 옛지명, 나중에 견주로 바뀜)에 나가 머물렀으니, 태상왕(太上王)의 환가(還駕)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태상왕이 양주 객사(客舍)에 머무르니, 임금이 알현(謁見)하고 술을 올려 매우 즐기었다. 저물어서 남교의 장전(帳殿)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새벽에 태상왕이 출발하여 해촌(海村: 현 의정부 장암동 '하촌들'ㅡ소원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 이곳을 선조들은 바다처럼 넓다 해서 '해등촌'이라 불렀음.)의 들에 머무르니, 임금이 따라와서 술을 올리고, 냇가의 행전(行殿)으로 물러와서 머물었다.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1406년 명 영락(永樂) 4년) 11월 5일(신유) 1번 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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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같은 두 임금이 두 번씩이나 의정부에서 회합을 했다!
이건 지금으로 따지면 빅뉴스 중에서 빅뉴스지요. 이 소문은 전국을 들썩들썩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이 사건으로 ‘의정부 삼정승들이 태상왕에게 옥새 도장을 받기 위해서는 의정부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전 백성이 모두 공유하게 되었을 겁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가장 짧게 전달하고 함께 인식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의정부’라는 이름으로 지명을 붙여 부르면 가장 깔끔하게 해결되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의정부’, ‘의정부’라는 말이 구전으로 전해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어떤 문제점이 발생하느냐?
글자로 정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의정부에 대한 표기법이 각양각색이 되어버리겠죠.
그 증거가 있냐고요?
바로 1787년 노상추 일기에 사용된 의정부(義正部)라는 글자와 1796년(정조 20) 승정원일기에 사용된 의정부(議政府)라는 글자와 고산자 김정호가 1864년 발간한 전국지도인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쓰인 의정부(議情阜)라는 글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는 의정부라는 말이 긴 시간 구전으로 내려오다 마침내 글로 표현되기 시작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