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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월, 단재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다. 내년이면 선언 100주년이다. 단재는 첫 구절부터 일본을 강도(强盜)로 부른다. 왜 강도인가?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기 때문이다.
또 단재는 일제가 운영하는 학교를 ‘노예양성소’라 규정하고, 조선사람으로 학교에서 가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면, “단군을 무(誣)하여 소잔명존(素盞鳴尊, 스사노오 노미코토)의 형제라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 말은 단군을 일본의 신(神)인 스사노모의 형제로 비유한 것이 잘못된 무고(誣告)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 이 말은 어디서 나온 말인가 그 유래를 알아보자.
1892. 8, 일본인 임태보(林泰輔,하야시 다이스케)가 쓴 <조선사>는 최초의 조선사 연구서로 알려졌다. 자칭 서양으로부터 배운 근대적 연구성과를 토대로 썼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사를 4기로 나누었다. 한군현(漢郡縣) 이전을 태고(太古), 삼국의 정립부터 신라 경순왕까지의 대략 992년을 상고(上古), 고려 태조부터 공양왕까지의 대략 456년을 중고(中古), 조선 태조 이후를 근세(近世)라고 했다. 또 지리와 인종, 풍속, 법률, 군사제도, 문학, 공업과 기술, 물산(物産) 등을 실었다. 아무튼 임태보의 <조선사>는 국내 학계에도 영향을 준 것 같다.
우선 임태보의 <조선사>는 단군을 서술하면서도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했다. 단군이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니 그 때가 중국의 요(堯)와 같다고 했다. 이어 1048년이 지나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임태보는 “그 이야기는 황당하기에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대략 일본 기원전 5, 6백 년경, 즉 상(商)의 말기에 해당하는 때에 북부 평안도 지역에 이미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부연했다. 앞에서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고 뒤에 와서는 긍정하는 것처럼 마무리 한다. 부정과 긍정을 교묘히 이용하며 조선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른다.
이어서 임태보는 단군에 대한 세주(細注)에서 또 다시 긍정과 부정의 두 측면을 교묘히 결합해 단군을 소잔명존(素盞(戔)鳴尊Tsutsanowo no Mikoto)의 아들인 ‘이타게루’라고 말했다. 단재가 형제라 한 것과 차이가 있다. 다음은 임태보의 말이다.
“단군은 다키(太祈)로, 스사노오 노미코토(素盞鳴尊)의 아들 이타게루(五十猛神)이다. 스사노오 노미코토가 그의 아들 이타게루를 이끌고 신라국에 이르러 소시모리에 거주했던 일이 일본역사에 보인다. 또한 이타게루를 다른 이름으로 한신(韓神)이라 하니, 대략 사실과 부합한다고 한다. 이 설 또한 억지에 가까우니 참고로 부기한다”(조선사)
임태보는 앞에서는 부합(符合)한다고 했다가 뒤에 와서는 억지에 가깝다고 발뺌한다. 독자보고 믿으라는 것인지 믿지 말라는 것인지 알송달송하게 말한다. 그러면 후학들은 자기가 편한 대로 인용한다. 아무도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논문이 아니라 소설이다. 한국의 이병도가 이런 문장법을 즐겨 사용했다. 그런 악습이 해방 80년이 다 되도록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1890년에 일본에서 나온 <국사안國史眼>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동경제국대학의 국사과 교재였다. 일선동조(日鮮同祖)론의 원형이 이 책에서 만들어졌다. 이를 위해 고대일본의 조선지배, 풍신수길의 조선침략, 정한론 등이 제기되었다. 그동안 신성시 했던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재해석을 가했다. 그래서 일선동조론을 만들기 위해 스사노오(素盞鳴尊)가 조선의 지배자가 되고, 이나히(稻飯命)가 신라의 시조가 되었다.
“일본 개국의 시조는 세 자식을 낳았다. 세 자식은 천조대신(天照大神), 월독명(月讀命), 소잔명존(素盞鳴尊,스사노오)이다. 그 중 스사노오는 행동을 함부로 하여 출운(出雲)으로 쫓겨나고 그곳을 다스리면서 시날 및 상세국과 교통을 하였고 나중이 한국(가라쿠니)으로 갔다. ~~ 그 중에 이나히(稻飯命) 신라국(新良國시라키)의 조(祖)가 되었다.”(국사안國史眼)
이처럼 <국사안>은 스사노오를 조선의 개국 시조로, 이나히를 신라 왕으로 등장시켰다. 다시 말하면 단군을 스사노오로 일체화 시키고, 그 스사노오는 일본의 천조대신과 형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먼저 나온 <국사안>은 천조대신의 동생인 스사노오를 조선의 개국시조라고 주장했고, 2년 뒤에 나온 임태보의 <조선사>는 스사노오의 아들 이타게루(五十猛神)를 단군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책에 대해 단재는 “단군을 무(誣)하여 소잔명존(素盞鳴尊, 스사노오 노미코토)의 형제”라고 주장하는 일본측을 비난했다. 형제란 동격(同格)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결국 단재는 단군을 스사노오, 천조대신과 동격으로 몰고 가려는 일본의 의도를 단호히 거부한 것이다.
이런 일제의 역사인식은 어디서 나왔는가?
이보다 200여년 전에 일본에서 간행된 한국의 <동국통감>(1667년 刊)의 서문에도 스사노오와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 처음 언급하고 있다.
“조선은 종류가 많다. 먼 태고 때에 단군이 그 나라를 열었다. 그러나 중화(中華)로부터 들어와 다스린 것은 기자(箕子)를 시조로 하며, 처음으로 조선의 호칭이 있었다. (중략) 혹시 일본의 국사로써 이것을 말한다면 곧 한향(韓鄕)의 섬인 신라국도 또한 스사노오가 경력(經歷)한 곳이다. 스사노오의 웅위(雄偉)는 박혁거세, 주몽, 온조가 일어났음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곧 미루어 삼한의 한 조상으로 삼는 것도 또한 왜곡된 것은 아닐 것이다.”(동국통감 서문)
일본의 <동국통감> 발간 서문에도 스사노오가 나오지만 감히 단군을 직접 연결시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을 처음으로 열었다는 ‘단군’과 삼한의 한 조상이 될 수도 있다고 우상화하여 ‘스사노오’를 병행하여 기술함으로써 이후 스사노오와 단군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연결고리를 명치 이후의 정한론(征韓論)자들이 악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단재가 <조선사>를 저술한 정한론자들의 음모를 몰랐을 리 없다.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조선사> 등은 한국인의 시각에서 집필한 것이 아니고, 일본인의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했다. 그들은 정한론(征韓論)을 배경으로 삼고 조선의 지배통지를 목적으로 삼았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사> 비판은 비단 고대사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조선사비판은 일제의 조선사편수회가 진행되는 동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신문연재를 통해 이루어졌다. 국내 신문연재가 단재에게는 유일한 대응 무기였다. 조선사를 놓고 벌어진 일제와의 역사전쟁에서 단재는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제가 쓴 조선사는 ‘거짓 조선사’였다. 단재의 표현을 빌면 ‘혹붙은 조선사’였다. 그의 붓끝은 매우 날카로왔다. 단재의 명저인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가 그것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단재는 “옳은 조선사는 곧 조선적 조선을 적은 조선사”임을 분명하게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