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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일반

<이박사 칼럼> 송파구청의 위험한 현수막, 광복절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했다는 비판 받아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서울 송파구(구청장 서강석)가 15일 77주년 광복절을 기념해 내건 현수막에 ‘건국절 74주년’이라고 함께 명시해 선열들의 항일독립운동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송파구청 전면에는 ‘77주년 광복절, 74주년 건국절’이라고 적힌 현수막과 ‘빛을 되찾은 그날, 나라를 세운 그날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서강석 구청장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송파구청과 27개 주민센터에 일제히 77주년 광복절뿐 아니라 74주년 건국절도 기념하는 플래카드가 걸렸다”고 밝혔다. 페이스북에는 현재 120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찬반이 팽팽한 것같다. 또 송파구청 홈피의 ‘구청장에게 바란다’에는 건국절 현수막 창피하다는 게시글들이 줄을 잇고 있다.

 

서 구청장은 1945년 8·15해방은 1948년 8·15 건국을 하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었다고 전제하고, “1945년 8·15부터 1948년 8·15까지 미군정 시대였고 백성들이 드디어 주인으로 등극한 날이 1948년 8·15 건국절이다. 74주년 건국절이 77주년 광복절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다른 이유로 “광복절은 자유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까지 모든 민족세력이 같이 일제에 투쟁하여 빛을 되찾은 날이다. 공산주의자에게까지 광복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공산주의자들은 자유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건국을 훼방하고, 반대하고, 급기야는 1950년 대한민국을 말살하기 위해 항적하는 6.25사변까지 일으켜 철저한 대한민국의 반역자가 되었다.”라고 밝혀 공산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자와의 차별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종합하면,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한 광복절은 아름답지 못한 날이고, 1948년 건국절은 공산주의자들이 배제되었으므로 가장 아름다운 날이기 때문에 1948년을 건국절로 더 기린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서(徐)구청장과 이에 동조한 송파구청과 같은 특정그룹의 정제되지 않은 게시물들이 일시적으로 자신들의 한풀이로 사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결과로 사회에는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에 몇 가지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첫째, 우리 헌법의 정신을 근간에서 부정하고 있다.

1987년에 개정된 현행 6공화국 헌법 전문(前文)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라고 하여 ‘임시정부의 법통’을 명시하고 있다. 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이라는 말은 단순히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고상한 말이 아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1919년 3.1운동으로 제정된 임시정부 헌장의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에 명시된 국호와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체와 국체를 계승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디 국호(國號)뿐이랴. 국기(國旗)와 국가(國歌)와 3.1절과 개천절 국경일까지 계승받고 있다. 나아가 임시정부 헌장 3조의 평등, 4조의 자유, 7조의 세계평화의 가치까지 현행 헌법에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대한민국의 법적 정체성(正體性)과 정통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만약 이것을 부정하고 1948년 정부수립일을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주장한다는 것은 자기의 친일행적을 지우는데는 필요할지 몰라도, 우리의 과거 존재 자체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헌법의 근간을 뒤흔드는 매우 위험한 반역인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진영간의 논쟁이나 호불호의 대상이 아니다. 오로지 1919년 3월 1일, 전국민적 항일혁명의 총의(總意)로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둘째,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기를 잡자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중국의 대표들은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상호 협력과 전후 처리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서 각국 대표들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최초로 논의하였다. 각국 대표들은 회담 후 대일(對日)전에 상호 협력하고,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차지한 영토를 회수하며,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다음과 같은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였다.

 

“(미국, 영국, 중국) 3대 연합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게 되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한다(determined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이와 같은 목적으로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행동을 속행한다.”

 

이 카이로 연합국 선언에서 분명히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였다. 이 안은 중국측에서 제안하여 미국과 협의한 내용이었다. 연합국이 공개적으로 임시정부를 공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용인(容認)하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약속한 것이다. 카이로선언의 초안은 ‘가능한 빠른 시간내 한국 독립’이라고 명시한 것을 영국이 자기네 식민지인 인도의 독립문제가 불거지는 점을 두려워하여 ‘적당한 절차를 거친 시기(in due course)’로 고쳤다고 한다. 훗날 이 한 구절이 남북 분단이 단초가 되었다.

 

당시 중국 장개석정부는 한국의 즉각적 독립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였다. 이런 주장은 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과의 공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혹자는 중국의 역할과 함께 임시정부의 역할을 부정하려고 하지만, 미영중의 연합국 지도자들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문에 명시할 수 있었던 것도 임시정부의 맹렬한 독립운동의 산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연합국이 ‘한국(Korea)’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고, 선언문에 명시도 안 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1943년 국제무대에 알려진 Korea의 존재는 오늘의 Korea와 동일한 나라이지 않은가?

 

 

따라서 1948년 건국절 주장은 1943년 카이로 선언문 속의 ‘한국(Korea)’을 스스로 부정하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1948년 건국설을 주장하면 ‘없는 나라’를 카이로선언이 독립시킨다고 국제적으로 선언한 곳이 되기 때문에 선후 모순이 된다. 그러므로 1948년 8월 15일은 국제연합이 승인한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일이고, 대한민국의 건국(개창)은 1919년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북한에 대해 역사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다. 6.25가 밉다고 선열들의 항일독립투쟁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여, 스스로 바가지를 깨는 우(愚)를 범하지 않기를 송파구청장에게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