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5 (일)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이박사 칼럼> 8월에 생각해본 일제의 잔혹한 강제토지조사사업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우리는 해방 77주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식민지비판학’을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식민지비판학이 무엇이라고 딱히 정의 내릴 수도 없다. 필자가 말하려고 하는 식민지비판학이란 일제의 실지적 식민지 지배 기간(1905~1945)에 일어난 가해자의 범죄행위와 피해자의 정신적 물질적 손실상태를 정직하게 실상을 드러내 비판하고 분석하는 학술활동을 통칭한다.

 

나아가 식민지비판학은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변형되고 변질된 한국사회의 구조를 분석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런 비판을 통해 식민지 지배문화와 그 잔재를 청산하여 한국사회의 바른 원형을 회복하는 데 목적이 있다.

 

소설 <파친코PACHINKO>를 광복절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복기하는 일은 의미가 있다. 이 소설은 서울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민간 이민진(Min Jin Lee) 작가의 영문 장편소설이다. 2017년 뉴욕에서 영문으로 처음 출간되었고, 한글판 번역본은 2018년에 나왔다. 2020년 현재 세계 29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2022년 3월, Apple TV+에서 소설과 같은 이름으로 드라마 <파친코>가 방영되어 더 큰 관심을 끌었다.

 

필자는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고 있는 사건 중에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을 서술하고자 한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황제 즉위식 다음 날인 1897년 10월 13일, ‘황지(荒地)의 개관(漑灌)’ 정책을 반포한다. 빈민구휼, 도로망 수리 등이 주요 골자이다.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저수지 제방을 쌓았다.

 

이어서 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되었다. 1898∼1904년 대한제국 정부가 전국의 토지를 대상으로 실시한 근대적 토지조사사업을 광무양전사업(光武量田事業)이라고 한다. 이는 근대적 토지제도와 지세제도를 수립하고자 전국적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사업의 실제 과정을 보면 양지아문(量地衙門)이 주도한 양전사업과 지계아문(地契衙門)의 양전·관계(官契) 발급 사업으로 전개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걸쳐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은 전국 토지의 3분의 2에 달하는 지역에서 완료되었다. 그나마 일제의 침략에 의해 중단된 것이다.

 

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은 토지를 측량하고 소유권 증명등기와 발급을 실시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민족의 토지를 수호하고 제국주의 경제침투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露日)전쟁을 도발하고 이를 기화로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다음에 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을 중단시켰다. 이처럼 일제가 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을 중단시킨 것은 향후 식민지 토지 약탈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토지조사는 1912년 ‘토지조사법’을 대폭 손질한 ‘토지조사령’이 공포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여기서 토지 과정의 제도화, 소유권 신고의 확정절차와 기구의 체계화, 등기제도의 도입 등이 강구되었다.

 

 

아울러 일제는 토지조사를 통해 식민지 지배의 경제정책을 효과적으로 집행했다. 먼저 이를 위해 일제는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조항을 없애고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합법화시켜 주었다. 또 대한제국 황실 소유의 땅을 조선총독부 소유의 국유지로 둔갑시켰다. 조선총독부는 전국토의 40%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하는 대지주(大地主)가 되었다. 나아가 총독부는 이 토지들을 일본 토지회사에게 무상 또는 싼 값으로 넘겨주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인 대지주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어서 일제는 농민의 토지를 노골적으로 강탈하였다. 마을 앞 뒷동산은 물론이고, 동네의 여유 땅, 미개발한 황무지, 주인 없는 땅,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들을 마구잡이로 국유화했다. 산림 자원까지 총독부가 빼앗아 갔다. 농민들은 졸지에 자기가 농사짓던 땅을 잃어 버렸다. 삼척군 농민 1천여명이 집단으로 항의한 사건도 있었다.

 

이때 가장 악랄한 활동을 한 곳이 동양척식주식회사였다. 한국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매수했고, 왜인(倭人)들의 이민정책을 돕는 첨병 역할을 했다. 소작료 50%를 받는 거대한 식민지 지주회사가 되어 한국 농민들을 이중으로 착취했다. 한국농민들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전통적인 농사법은 공동체에 서로 의존한 것이었으나, 일본인 지주의 출현으로 서로 돕는 아름다운 농촌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일본 극우의 침략노선을 옹호하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이런 괴변을 하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일제가 시작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근대적 토지소유권이 확립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대한제국 시대에 근대적 토지소유권은 정립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토지소유권 및 지세(地稅)제도의 시작은 일제강점기 실시되었던 토지조사사업부터가 아니라, 근대국가로의 전환점에 서 있었던 대한제국 시기에 시행된 광무양전과 지계(地契;토지소유권)관계 발급사업을 통해 근대적인 토지소유권 및 지세 세도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처럼 대한제국의 광무양전사업이 토지제도상으로 볼 때, 한국 중세 사회의 최종 귀결점이면서 근대사회로의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광무양전과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비교」 인용)

 

소설 <파친코>는 일제의 수탈로 어려웠던 농촌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곳 시골 사람들은 다들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었지만 훈이네 집은 무척이나 안락해 보였다. 중매쟁이는 훈이도 건강한 신부를 맞이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상대는 울창한 숲 속 너머의 섬 반대쪽에 사는 여자애였다. 그 여자애의 아버지는 소작인이었는데, 최근 토지조사로 임차권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신세였다. 이 홀아비는 빌어먹게도 딸만 넷에 아들 하나 없었다. 하도 가난해 숲에서 주워온 것이나 시장에 내놓을 수 없는 생선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아주 가끔은 이웃이 적선해주는 것으로 간신히 배를 채우기도 했다.”(1권, 16쪽)

 

Satisfied with the boardinghouse’s comfortable situation in a country growing steadily poorer, the matchmaker was certain that even Hoonie could have a healthy bride, so she plowed ahead.

The girl was from the other side of the island, beyond the dense woods. Her father, a tenant farmer, was one of the many who’d lost his lease as a result of the colonial government’s recent land surveys. The widower, cursed with four girls and no sons, had nothing to eat except dor what was gathered from the woods, fish he couldn’t sell, or the occasional charity from equally impoverished neighbors.(PACHINKO, p.6)

 

당시 한국 농촌 사람들은 그나마 소작(小作)으로 생계를 유지해왔었는데, 소작했던 그 지주가 일제에 땅을 빼앗기게 되니까 그 소작도 할 수 없이 되어 임차권을 잃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최근’이란 1910년대 조선의 농촌을 말한다. 심지어 소작료가 50%에서 60%로 오른 곳도 있었다. 농민들은 점점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빚더미에 앉은 한국 농민들의 농지는 급기야 왜인(倭人) 지주들에게 팔려 갔다. 농민들은 일제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다. ‘이웃이 적선해주었다’는 말은 일제의 수탈 속에서도 농민들은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갔다는 뜻이다. 그마나 허물어져 가는 농촌사회를 지탱해준 것은 한국인들의 정(情)이었고,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공동체 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