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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논단> 동학농민혁명 정신과 윤봉길의사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해방이 되어 상해에서 귀국한 김구 선생은 귀국 즉시 천도교 대교당에서 귀국 연설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도교가 없었다면 3․1운동이 없었고, 3․1운동이 없었다면 이 대교당이 없고,

이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해 임시정부가 없고, 상해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이 없었을 것입니다.

 

  살벌한 일제의 감시하에 일일이 ‘동학도’라는 명함을 나타낼 수 없던 무서운 시절에, 잘 알려진 데로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동학(천도교)인들 속에는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함께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봉길, 이봉창 열사가 있다.

 

먼저 윤봉길 의사가 중국 만주로 망명하기 전,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의 ‘농촌계몽할동’ 기록을 보면, 그가 동학에 심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천도교 청년당의 『개벽지』를 탐독했으며, 천도교 청년당에서 운영하던 『조선농민사』와 직간접적인 연장선상에서 월진회(月進會)를 운영하였다는 사실에서, 윤봉길 의사는 분명 ‘동학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 투척한 이봉창 열사는 천도교에서 세운 청엽정(靑葉酊)의 문창학교(文昌學敎)에 입학(11세)하여 15세에 졸업한 천도교인으로써 4년간 천도교 학교를 다녔다.

 

특히 매헌 윤봉길은 1922년에 동학접주 배성선의 딸(배용순)과 결혼하고, 바로 그 즈음에 동학이라는 딴 세상의 윤리를 얻게 된다.

 

동학농민혁명 홍성전투에 참가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장인 배성선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윤봉길의 청년시절은 장인으로부터 영향받은 동학의 윤리가 그의 진취성에 작용되어 동학사상에 깊이 심취하였다. 그리하여 결혼 후의 매헌은 새벽에 일어나 동문 옆 우물가에 짚을 깐 후에 정화수(청수)를 상 위에 올려놓고 매일같이 동쪽을 향해 절하고 이 주문을 낭송했다고 한다.

 

1. 인생의 전환점이 된 윤봉길의 결혼

 

윤봉길 의사의 장인 배성선은 동학농민혁의 참여자였다.

배성선은 동학의 홍주 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 홍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총상을 입고 숨어 지내며, 뒷날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한 천도교의 덕산접주였다. 그리고 배성선 접주에게는 장녀 배용순이 있었다.

 

윤봉길 의사가 15세에 배용순과 혼인을 하여 처음 장인 만났을 때, 윤봉길은 장인 배성선의 미간에 넘치는 영기(靈氣)에 저절로 감화되었다고 한다. 진한 눈썹 아래로 툭 삐져나온 눈언저리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으며,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섬광처럼 번쩍이는 두 눈은 깊은 호수와 같았고, 거무스레한 얼굴색은 깊숙하게 파인 주름살 때문에 조금은 겉늙어 보였다고 회고하였다.

 

배성선은 1868년생으로 충청도 내포 동학의 도소(都所)가 있던 목소(木巢=현 삽교읍 성리) 이웃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리하여 20대에 홍성 동학접주 최준모의 안내로 덕산대접주 박인호(1907년 천도교 대도주)에 연원을 대고,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에 참여했는데 그때의 나이가 26세였다. 배성선은 1904년 동학의 갑진개화운동에 참여하였고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25년 뒤인 1919년에도 내포 동학의 불사조와 같아서, 철저하게 민족자주의식이 골수에 박혀 기미 3,1독립 만세운동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梅軒 윤봉길은 1922년 배성선의 사위가 된 뒤로 처갓집에 갈 때는 꼭 막걸리 한 통씩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내포 동학의 접주였던 배성선은 평소에는 말 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사위 윤봉길이가 장인에게 가지고 온 윤씨네 막걸리를 마실 때마다 이웃 사람들에게 사위 자랑을 하였고, 윤봉길에게는 동학정신을 들려주곤 했다. 배성선이 윤봉길을 기다리는 것은 윤봉길이 가지고 오는 막걸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위가 오면 가슴속에 깊이 담고 있었던 동학 이야기를 마음껏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봉길이 부인 배용순과 함께 처음으로 처갓집에 갔을 때부터, 윤봉길은 장인에게 끌려 밤새도록 장인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다음은 도서출판 경혜사(耕慧社)에서 출판된 『윤봉길 의사의 일대기(신호응, 이성재, 윤규상 共著)』에 실린 윤봉길과 그의 장인 동학접주 배성선과의 대담내용이다.

 

자네 동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봉길은 고개를 저었다.

음 ~ 듣지 못했다? 그렇겠지! 그 때는 자네가 태어나가 전의 일이니까.

그렇겠지 동학당은 사람마다 평등하고 귀천이 따로 없다는 구호를 걸고

새로운 백성으로 각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네..신국가의 개념은 부패한

조선왕조와 외세의 침략자를 몰아내고 민족 자주적인 태평성세를 꿈꿨지..

 

당시 나는 동학 규정에 따라 동학당에 가입하려고 쌀 한말과 백지 세 두름,

초 두 대를 바치고 하느님께 선서하고 맹세를 했다네. 그 뒤로 동학당은

수백 수천명으로 늘어났는데, 그 중에는 총을 가진 포수도 있었지.

 

한번은 저수지 전투에서 왜놈들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때 백성들은

동학당 사람들을 영웅으로 보았으나 무기가 좋은 왜군과 관군들을 당할

길이 없어서 실패하고 말았다네. 그리하여 전국은 궤멸된 동학당의 피로

물들었다네.

 

윤봉길 의사는 장인 배성선이 들려준 동학당 이야기를 듣고, 동학농민군이 행군을 하면서 외웠던 동학당주문(呪文=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을 경청하면서, 단순한 한 시대의 역사로서만이 아니라 장인 배성선과 같은 동학당 사람들의 전모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날 사위는 장인이 우물에서 맑디맑은 청수를 그릇에 떠 놓고, 절을 올리면서 경건하게 동학 주문을 외우면서 다음과 같은 말도 해주었다.

 

사람 마음은 마치 사발과도 같다네.. 그 사람은 평소에 마음을 잘 닦지

않으면 더덕더덕 떼가 끼어서, 그 사발로 물을 마시면 물맛이 나지 않는

법일세.. 그 떼가 곧 잡념들에 의한 ‘탁기’라네,..내가 외우는 주문은 마음

사발을 씻어주는 방법일세,..내 마음에서 잡념과 번뇌를 싹 씻어주면,

세심혁면 (洗心革面)이 되어 마음의 안정을 찾아 비로소 큰 일을 할

수가 있을걸세,..지금 내가 하고 있는 동학운동은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 대도창명(大道彰明)이 목적이라네....

 

사위 윤봉길은 “하늘님을 내 몸에 모시고 하늘님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정해서, 평생토록 잊지 아니하면, 만사가 동학인의 뜻대로 이루어 지리라”는 장인의 주문 소리를 들으며, 눈 앞에 진한 피가 홍건히 흐르고 있는 동학농민혁명군의 전쟁터가 아련히 떠 오르곤 했다고 한다.

 

윤봉길이 훗날에 알게 된 일이지만, 동학당들이 매일 새벽 동이 틀 즈음, 전투에 나가기 전, 산상의 진지나 우물가에서 외우는 주문(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소리는 동학당인들이 가장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수련의 방법이었다고 한다. 장인 배성선은 동학당에 가입한 그 날부터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 주문 수련을 해왔노라고 봉길에게 전했다. 이 주문으로 명상 수련을 하면, 자신의 새로운 심령(心靈)이 살아나와서 영혼이 평온한 경지에 이르러 용맹한 슬기의 사명감이 솟아올라, 왜놈들의 총탄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벌판을 내달려도 도무지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위 봉길도 장인의 말에 감화되었다. 동학의 주문은 주술이 아니라 굳은 신념을 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윤봉길도 장인과 함께 동학당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

 

2. 학생으로부터 청년 교육자로 성장한 윤봉길

 

윤봉길은 을사늑약이 된 3년 뒤인 1908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목바리에서 윤황(尹堭)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윤우의(尹禹儀)이다. 결혼 전인 11세(1918년)에 충남 예산 덕산면에 있는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 12세에 보통학교 2학년을 자퇴하고,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성삼문의 후손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문하생이 되어 사서삼경을 배우며 매곡으로부터 매헌(梅軒)이라는 당호도 받았다. 봉길은 이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15세(1922년)에 동학군이었던 배성선의 딸 배용순과 결혼하였다. 이때부터 장인 배성선의 영향을 받아 동학의 주문 수련으로 독립정신을 견고히 키워나갔다. 그리고 동학(천도교)에서 발행하는 『개벽』 잡지와 『농민』 잡지를 탐독하면서, 1927년인 20세부터는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농민운동의 첫 단계로 자기 집 사랑채에 야학을 차리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갑과 을 2개 반으로 나누어 한글을 가르치고, 마을 청년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여 월례 강연회도 개최하였다. 그리고 그는 『개벽지』와 『농민지』를 토대로 야학 교재인 3권의 『농민독본』을 저술하였다. 그 『농민독본』의 내용을 보면, 20세의 청년 윤봉길이 매우 개화적인 사회의식과 투철한 자주 독립정신이 체계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22세(1929)에는 농민운동단체인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월진회」라는 이름은 천도교의 「진보회」를 이용구가 송병준의 「일진회」로 합병시키면서 그 「일진회(一進會)」가 매국단체로 변질되었으므로 「월진회(月進會)」로 정하게 되었다.

월진회의 활동은 1) 야학을 통한 문맹 퇴치 운동, 2) 애국 사상 및 정치의식의 고취, 3) 공동경작 및 공동식수를 통한 공동정신의 함양, 4) 축산 등 농가 부업을 통한 농가의 경제생활의 향상, 5) 소비조합 운동, 6) 위생 보건사업 및 청소년의 체력단련 등이었다.

 

일제는 윤봉길의 농민운동을 불온시하여 자주, 덕산 주재소로 호출하였다. 그는 농민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와 독립을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더욱 투철하게 되었다.

 

3. 상해 망명과 동학농민혁명군 해주접주 백범 김구와 상봉

 

윤봉길은 심사숙고 끝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하여 1930년(23세) 3월 6일 『장부출가생부환(丈夫出家生不還)=(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을 남겨놓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최종 목적지는 임시정부와 김구가 있는 상하이(上海)였다. 그는 칭다오(靑島)에서 1931년 10월 18일 고향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서 “우리 청년 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간다는 결심이었습니다”고 조국과 겨레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길에 나섰음을 천명했다.

 

1931년 7월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한국과 중국 양 민족의 분쟁을 부추겼고, 그 결과 중국인의 반한・반일감정이 고조되자, 이를 만주 침략의 구실로 삼았다. 1931년 9월 18일 일제는 만주 침략을 감행하여, 1932년 3월 1일 조선의 ‘대한제국’처럼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부이의 ‘만주국 괴뢰정권’을 수립해서 만주를 일제의 직접적 지배하에 두었다. 그리고 이듬해 1932년 1월 28일 상하이를 침략하여 1개월 만에 상하이를 점령해버렸다.

 

마침 1931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무회의 회의에서 특무대를 조직하여 특공작전으로 독립운동을 활성화할 것을 결의하였고 전권을 김구(金九, 1876~1949)에게 위임하였다. 김구는 즉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특공작전 모색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윤봉길은 황해도 해주 접주 김구를 찾아갔다. 그리고 동학꾼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이 필요할 때는 매헌 윤봉길 자신이 그 일을 담당하겠노라고 자원을 했다. 백범 김구는 자신이 동학 농민군의 황해도 해주접주였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만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윤봉길을 꼭 껴안았다.

 

일본군은 1932년 4월 29일 천장절 기념과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전승 경축식을 일본 조계인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하였다. 이날 백범 김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매헌은 일본 침략군 총사령관 이하 군정 수뇌들을 향하여 폭탄 투척 거사를 시행하였다. 이때 중국 중앙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는 “중국군 30만 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 조선의 청년이 해냈다”고 윤봉길 특공 의거를 높이 평가했다.

 

4. 동학의 주문을 낭송하며 장열하게 순국

 

매헌 윤봉길은 홍구공원 현장에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거사의 배후를 추궁당했다. 그러나 윤의시는 1932년 5월 10일 ‘대공보’를 통해 “홍구공원작탄진상(虹口公園炸彈眞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할 때까지 일체 배후를 함구하였다. 그리고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살인 및 살인미수, 포발물위반”이란 죄명으로 단심 사형이 언도되었고, 11월 18일 일본 오사카로 압송되어 11월20일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사형 집행장소는 현재의 가나자와시 교외인 이시가와현(石川縣) 우치가와무라(內川村) 미고우시(三小牛). 가나자와 육군작업장의 험한 서북 골짜기에 설치되었다. 동년 12월 19일 추운 겨울날 아침식사를 거부한 채, 18명의 호송원에 의해 처형장에 도착한 윤의사는 체포 당시의 모습 그대로인 쥐색 중절모에 구겨진 양복 차림이었다.

 

윤봉길 의사는 십자의 형틀에 묶인 후, 간수장인 다치다 소령이 최후 진술을 하라고 하자 침착하게 “아무 남길 말이 없다”고 한 후, 돌연히 낭랑한 목소리로 시(詩)를 읊는 듯 무엇인가를 외우기 시작했다. 이 세상을 마지막 하직하는 순간에 읊은 것은, 다름 아닌 동학의 21자 주문 소리였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

 

이윽고 헌병이 중절모를 벗기고 검정색 형모를 씌워서 눈을 가렸다. 그리고 니시노 중위의 구령으로 두 명의 사수(射手)가 연속 주문(呪文)을 외우고 있는 윤의사를 향하여 총을 쐈다. 총탄은 정확히 윤의사의 정미간에 명중하면서 피를 뿜어댔다. 일순간에 동학의 주문 소리가 멈추면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불태웠던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하늘로 퍼져 나갔다. 매헌 윤봉길 의사가 25세의 짧은 생애의 최후를 맞이했던 이 순간이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