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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일반

<지명따라 역사찾아> 의정부를 다시 품다. 7

야사(野史)가 전하는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과 의순공주(義順公主)의 진실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내 딸을 돌려주십시오.”

이 얼마나 간절한 표현입니까?

“내 딸을 돌려주십시오.”

이 얼마나 피눈물 나는 표현입니까?

이 글은 청나라에 조선 사절단으로 간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이 제3대 황제 순치제(順治帝)에게 올린 상소문(上疏文) 내용 중의 일부입니다.

전 날 상소문(上疏文)을 올리기 위해 글을 쓰는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은 아마도 피(血)를 찍어 눈물에 새겨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절규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청황제 순치제(順治帝)에게 상소(上疏)하는 중입니다.

“내 딸을 돌려주십시오.”

 

"내가 만방(萬方)을 어루만져 기르느라 널리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두고 있으니 원래 내외(內外)를 구분함이 없고, 그대 나라는 대대로 번국(藩國)이라 칭하여 순종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지극한 정이 서로 연관되었으므로 또한 마땅히 살펴 돌볼 것이다. 조선의 신하인 금림군 이개윤(李愷胤)의 딸이 과부로 집에 살고 있으면서 부모 형제를 멀리 이별하였으니, 내가 측은하게 여긴 지 오래되었다. 또한 이 여인은 왕에게 이미 종친이 되고 또 어루만져 길렀으니, 왕이 늘 마음에 둠이 실로 깊을 것이다. 지금 개윤이 공물을 바치느라 조정에 와서 그 딸을 보고자 주청하니, 전부터 가엾이 여긴 나의 뜻이 더욱 절실해졌다. 이에 특별히 태자 태보(太子太保) 의정 대신(議政大臣) 합집둔칙(哈什屯則)을 보내 귀국하게 하고 친척에 의지하여 조용히 살게끔 하니, 왕은 그리 알라."

<효종실록 16권, 효종 7년 4월 26일 갑술 1번째기사 1656년 청 순치(順治) 13년>

 

피맺힌 절규는 청황제 순치제(順治帝)를 감동시키고 설득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1650년 4월 22일 16살에 고향산천을 떠난 의순공주는 1656년 효종 7년 그녀의 나이 22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향 의정부로 돌아올 수 있게 되죠.

 

왕도 못해낸 조선을 구한 여인 의순공주(義順公主).

그녀를 설득하여 23살이나 차이나는 39살 오랑캐 도르곤에게 시집을 보낸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

바람 앞에 촛불 같았던 조선의 운명을 심지 돋우어 살려준 이 두 부녀(父女)의 아름다운 희생.

나라에서는 나서서 상을 주고 백성들은 고마움에 칭송하며 후세에 길이길이 기억하도록 기록에 남겨도 모자랄 어마어마한 사건.

그러나 세상사가 그런 것인가? 아니면 조선 정치가들의 습관이 그런 것인가?

나쁜 소리 만드는 습관들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별로 다르지 않았는지 두 사람의 앞길은 두 부녀(父女)의 값진 희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나라를 위함이 아니라 청국에서 보내는 채폐(綵幣: 혼인선물)가 많음을 탐낸 것이다. 개윤은 극히 집이 가난했는데 부자가 되었다. 공주는 섭정와 도르곤이 받아들였다가 뒤에 소박하여 버리고 그이 하졸에게 시집보냈더니, 이향진이 이개윤과 함께 사신으로 북경에 가서 글로 아뢰어 그 딸을 데리고 돌아오니 당시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하였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조선 후기 이긍익이 지은 조선의 사서.)』

 

환향년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의순공주(義順公主).

딸 팔아먹은 파렴치한(破廉恥漢)으로 손가락 질 당하며 살아야 했던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

 

"의순 공주(義順公主)가 청나라로 간 것은 조정의 명령 때문이었으니 의순 공주가 돌아오는 것도 또한 반드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금림군 이개윤(李愷胤)은 일의 체제를 생각하지 않고 조정을 업신여기며 사사로운 뜻에 끌려 멋대로 돌려달라고 청하였으니, 국법에 있어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전 호군 이행진(李行進)과 전 정(正) 이지무(李枝茂) 등은 못하게 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찬성하였으며 말할 때에도 또 망발이 많아 사신의 임무를 형편없이 수행하였으니 그들의 죄도 똑같습니다. 어찌 파직만 시키고 말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삭탈 관작하여 성문 밖으로 쫓아내소서."

하였다. 여러 번 아뢰자, 상이 따랐다.

<효종실록 16권, 효종 7년 윤5월 10일 정사 1번 째 기사 1656년 청 순치(順治) 13년>

 

의순공주를 청나라에서 데려왔다는 이유로 파직을 넘어 삭탈관직(削奪官職)에 성문 밖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해야 했던 이개윤(李愷胤)과 그 가족들.

 

여기서 잠깐! 호흡을 가다듬고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의 입장이 되어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주 냉정하게, 그 어떤 상황보다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입장에서 두 부녀(父女)의 사건에 대하여 매의 눈으로 되짚어 봅시다.

본인이라면 청국에서 보내는 채폐(綵幣: 혼인선물)가 탐나고 가난한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서 애지중지하던 금쪽같은 딸을 오랑캐에게 시집을 보낼 수 있으십니까?

효종도 못 하고 조선에 사는 모든 대신들도 못 했고 누구도 못 할 일을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은 할 수 있다는 이 말도 안 되는 판단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내릴 수 있는 겁니까!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은 삭탈관직 당한 이후에도 또다시 조정이 불러 청국진하정사(淸國進賀正使) 등 또 다시 역할을 맡길 정도로 당시 실력을 인정받는 엘리트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딸 팔아먹은 철면피(鐵面皮)에 시정잡배(市井雜輩)로 몰아세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못 하겠는데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은 할 수 있다는 이런 내로남불 같은 발상은 누가 주장하는 겁니까?

그건 바로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같은 책으로 먹물 티 팍팍 내며 공감능력 1%도 없는 양반입네 하는 사람들이 하는 행위 아닙니까?

당시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을 했다고요? 과연 백성들이 했을까요? 힘있고 빽있는 먹물들이 그랬겠지. 힘없고 빽없고 환향년이 되어 돌아온 누이와 여동생이 있는 백성들이 그랬겠느냐 이 말입니다.

“내 딸을 돌려주십시오.”라며 청나라까지 찾아가 의순공주(義順公主)를 구하려한 아버지 이개윤(李愷胤)이 그랬겠느냐고요.

 

그렇다면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과 의순공주(義順公主) 이애숙(李愛淑)은 왜 이렇게 복잡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몸을 던진 것일까요?

오랑캐에게 팔려가듯 시집을 가면, 어떤 수모와 위험이 뒤따를 거라는 걸 두 부녀(父女)는 과연 예측하지 못 했을까요?

아무리 조선 시대라고 하지만 자기 목숨을 내놓으라는 소리와 똑같은 결정을 따르라한다고 따르는 사람은 하늘 아래 도대체 몇이나 될까요?

가난한 생활을 벗어나보자고 딸을 팔아먹고 또 한술 더 떠서 그 뜻을 군말 없이 따르는 딸은 조선 천지에 과연 몇 명이나 찾아볼 수 있을까요?

16살에 목숨을 내놓는 결정을 할 때는 소영웅주의로는 불가능합니다. 관심종자 끝판왕들은 불가능합니다. 경제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불가능합니다.

자기를 넘어선 의로운 결정, 소녀 심청이와 같은 자발적 선택이 없으면 불가능한 결정입니다.

명예로운 결정이 아니고는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내놓을 사람은 세상천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과 의순공주(義順公主) 이애숙(李愛淑)은 바로 의로운 결정, 명예로운 결정에 서로 합의했기에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두 부녀(父女)의 진실, 그들의 의로운 결정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조선에서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인을 돌려보내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청나라로 끌려간 사람이 적게는 20만, 많게는 50만으로 추산하고 있는 걸 보면 어마어마한 숫자가 끌려가 고통 받고 있었던 겁니다.

때마침 청나라 권력 정점에 서있는 도르곤이 대복진(大福晉: 정실부인 중 으뜸)으로 조선의 공주를 원한다 하니 ‘조선인을 돌보고 돌려보내는 의로운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기회라고 두 부녀는 판단했을 겁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숨겨진 진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드라마로 방영이 되었기에 유투브의 주소를 아래에 공개해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gQwMTqB2JY (채널A 천일야사 41회)

 

혹자는 그럴 겁니다. 그래도 소나기 올 땐 피하는 것이 상책 아니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랬을 겁니다. 아니 그랬던 겁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공감능력이 뛰어나게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보면 내 밥을 나누어 먹어야 하고 헐벗은 이를 보면 내 옷을 벗어주어야 속이 시원한,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공감능력이란 똑똑해야 주어지는 게 아니고 많이 배웠다고 습득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부자이기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이 아니고 가난하기에 저절로 성장하는 감정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신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이런 사람들의 선행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후세들은 그 뜻을 빛나는 자리에 모셔 역사에 길이길이 남기는 일을 하는 겁니다.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과 의순공주(義順公主)는 가난했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했고, 인간다움을 추구했기에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인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삶의 자세를 한 단어로 정리하면 ‘애국심(愛國心)’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과 의순공주(義順公主) 두 부녀의 숨겨진 진실은 바로 조선을 살리겠다는 ‘애국심의 발현’이었던 겁니다.

 

청에서는 예충친왕의 배우자를 데려오는 일로 정명수를 조선에 보냈는데, 정명수는 원래 조선인으로 명과 후금(後金)의 전쟁에 동원되었다가 후금의 포로가 된 인물이었다. 이후 조선 포로들은 석방이 되었으나, 정명수는 조선에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남아 청의 역관이 되어 청의 조정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이러한 권력을 바탕으로 정명수는 조선에 올 때마다 권세를 부리며 조선인들을 괴롭혔는데, 의순공주를 데리러 와서도 악행을 저지르며 은화를 빼앗고자 하였다. 그러자 의순공주가 정명수를 불러, 자신이 예충친왕과 혼인을 한 후 정명수에 대하여 알리면 목숨이 끊어질 것이라고 꾸짖으며, 곤장을 치려고 하자, 정명수가 겁을 내어 죽기로 간청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를 들은 조선 사람들은 의순공주가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정명수의 콧대를 꺾었다며,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다.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조선 후기에 서유문(徐有聞)이 지은 연행록.)』

 

간단히 정리하면 청나라 앞잡이 정명수가 같은 조선인을 괴롭히는 것을 본 의순공주(義順公主)가 꾸짖었다는 이야기.

이 모습이 16살 의순공주(義順公主)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당당하고 결기에 찬 모습입니까!

‘조선인에 대한 사랑’ ‘조선을 살리겠다는 애국심’이 그대로 반영된 사건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의순공주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선 몸이기에 이렇듯 의연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로써 이제 우리는 당당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의순공주(義順公主) 사건은 제국주의에 희생된 조선 누이의 안타까운 사건이자, 조선을 살리려 의로운 결정을 마다하지 않았던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과 의순공주(義順公主) 두 부녀(父女)의 주체적 합작품이었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의로운 선행으로 역사를 만들어 낸 분’들에 대한 예의. 그 뜻이 바라지 않도록 빛나는 자리에 모셔 역사에 길이길이 남기는 일!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과 의순공주(義順公主) 묘역을 향토문화재로 지정하는 일에 함께 앞장서는 일.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