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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사(望月寺)로 올라가는 두 사람의 여정은 험난했습니다. 배나온 신동명교수(60세)와 그를 끌고 가야 하는 김수원형님(72세).
72세의 나이에도 청년의 몸을 지닌 김수원형님과 60세임에 불구하고 펭수의 하체를 가진 신박사. 그들이 2022년 5월 14일 오후3시에 찾아 나선 오늘의 지명여행은 두 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수원형님이 온조대왕과 관련한 ‘용의 우물(용정(龍井))’이라 주장하는 극한의 가뭄에도 절대 마르지 않는 커다란 샘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용의 우물(용정(龍井))’의 정체가 어떤 형태로든 드러난다면 ‘회룡분지(回龍盆地)’라는 지명은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어 돌아왔기에 사용된 지명이 아니라 온조대왕이 저녁마다 용이 되어 바다로 나갔다 돌아왔기에 생겨난 지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사실 여제(女帝) 소서노와 온조대왕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회룡분지(回龍盆地)’를 중심으로 몇 군데의 지명은 온조국(溫祚國)의 역사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불타는 향학의 여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의구심이 풀리기만 한다면 '회룡분지(回龍盆地)'가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이었다는 또 다른 강력한 증거가 될 뿐만 아니라 2,000년 전 온조대왕의 역사가 새롭게 부활하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게 될 것이니 이 얼마나 기쁜 발걸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의정부 사람들은 ‘회룡분지(回龍盆地)‘라는 단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을 할까요? 아마도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지명이라고 쉽게 생각할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래의 내용이 워낙 유명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회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로, 681년(신사 신문왕 1년)에 의상(義湘) 대사가 법성사(法性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합니다.
그 뒤 930년(신라 경순왕 4년)과 1070년(고려 문종 24년)에 중창을 했고, 1384년(고려 우왕 10년) 무학대사(無學大師) 자초(自超)가 중창을 했습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와 함께 이곳에서 3년 간 수도하였으며, 그 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이곳에 다시 찾아오자 용(龍, 국왕)이 돌아왔다 하여 절 이름을 ‘회룡사’로 바꾸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설에는 이성계가 왕자의 난 이후 왕위에서 물러나 함흥에서 머물다가, 1403년에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절로 무학대사를 찾아오자, 무학대사는 ‘회란용가(回鸞龍駕)’라고 기뻐하면서 절 이름을 ‘회룡사’로 바꾸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래와 같은 온조대왕 관련한 전설을 소개하게 되면 기존의 믿음은 헷갈리기 시작할 겁니다.
백제건국 초기, 형인 비류와 헤어져 산 위에 나라를 세운 온조는 동쪽으로 내려가서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키우는 방법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사냥하러 다녔으나, 밤에는 잠자리에 들어가면 새벽까지 일체 바깥에 몸을 나타내지를 않았다.
위례성 우물은 온조가 잠자는 움막의 바로 옆에 있었다. 밤이 되면 온조는 움막에서 나와서는 샘으로 들어간 후 용이 되어 북쪽으로 뚫린 한강으로 나갔다. 위례성 우물을 중심으로 땅속으로는 한강과 금강으로 통하는 강줄기가 있었다.
북쪽에서 떠나올 때 틀림없이 자기가 나라를 세우면 그들이 침범해 올 것을 예상했었다. 그래서 북쪽으로 올라와서 한강 변에 나와서는 북쪽 하늘을 살피고는, 적의 침범이 없을 것 같으면 곧장 물줄기를 타고 위례성 우물로 돌아왔다가 남쪽으로 내려가서는 금강 쪽으로 내려갔다.
온조는 매일 같이 이와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이 설화는 양주(의정부, 남양주) 일대, 하남, 충남 등지에 ‘백제 위례성 우물 설화’, ‘우물가 설화’ ‘용샘(龍泉) 설화’ 등의 이름으로 폭넓게 분포되어 있는 ‘백제용신설화(百濟龍神說話)’입니다.
어떠세요? 읽어보시니까 헷갈리시죠!
‘회룡분지(回龍盆地)’의 ‘회룡(回龍)’이 태조 이성계가 아니라 온조대왕과 연관됐겠구나 하는 의구심이 생길 겁니다. 아마도!
왕이 되어 돌아온 태상왕 이성계와 매일 저녁마다 용이 되어 바다로 나갔다가 새벽이면 돌아오는 온조대왕.
이 두 사람 중 ‘회룡(回龍)’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인다면 누가 더 어울릴까요?
이렇게 진행이 되다보면 ‘회룡사(回龍寺)’의 ‘회룡(回龍)’도 태조 이성계가 아니라 온조대왕과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게 되죠.
그런 의심을 구체화 시키는 글을 하나 소개해볼까요?
‘회룡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신라 때 초창되었다는 설과 조선 초에 창건되었다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우선 1977년 봉선사에서 발행한 『봉선사본말사약지(奉先寺本末寺略誌)』에 의하면 절은 681년(신문왕 1) 의상스님이 창건하여 ‘법성사(法性寺)’라 불렀다고 한다. 창건 이후에는 930년(경순왕 3) 동진국사(洞眞國師)가 재창하고, 1070년(문종 24) 혜거국사(慧炬國師)가 3창하였으며, 다시 1384년(우왕 10) 무학대사(無學大師)가 4창하고, 1403년(태종 3)에 ‘회룡사’로 고쳐 불렀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무학대사 이전의 사실은 전하는 자료가 없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권상로가 편찬한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하권의 회룡사항에는 한결같이 무학대사에 의하여 1384년(우왕 10) 또는 1395년(태조 4)에 처음 창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상반됨을 볼 수 있다. 또 조선 초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주목 불우조에도 망월사·영국사 등과 함께 도봉산에 있는 절로 나와 있어 무학대사의 창건설이 더 신빙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게 무슨 의심을 구체화 시키는 글이냐고요?
오히려 무학대사와 이성계 사건에 손을 들어주는 자료 아니냐고요?
과연 그럴까요?
첫 번째 글줄에 포인트를 두고 보시면 ‘회룡사(回龍寺)’ 창건에 대한 명확한 자료가 없다는 것이고, 신라 때 초창되었다는 설이 있다는 것은 사국시대(四國時代: 가야 포함) 쯤에 또는 그 전 세워진 절일 수 있다는 겁니다.
상상은 돈이 들지 않고 누구에게나 허용되어 있으니까 상상 한 번 해보시죠. 뭐.
그리고 ‘다시 1384년(우왕 10) 무학대사(無學大師)가 4창하고, 1403년(태종 3)에 ‘회룡사’로 고쳐 불렀다’라는 부분도 앞뒤가 안 맞는 것이 1405년(태종 5)에 태상왕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의정부 호원동 전좌마을에서 만나기 때문에 그 이후에 ‘회룡(回龍)’이 되어야 하는데 그 전에 ‘회룡사(回龍寺)’라 불렀다?
이 부분 역시 저의 의구심을 구체화 시키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망월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해호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망월사라는 명칭은 당시 선덕여왕의 총애를 받던 해호 선사가 도봉산에서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바라보며 삼국 통일과 왕실의 융성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망월사(望月寺)에 남아있는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전설인데요. 이 정도라면 ‘회룡사(回龍寺)’ 도 삼국시대(三國時代) 또는 사국시대(四國時代: 가야 포함) 쯤 세워진 사찰(절)일 수도 있겠다는 추리를 해볼 수 있는 거죠. 어찌 되었든 정확하게 글로 남아 있지는 않는 거니까. 뭐 쩝.
왜 신박신박 신동명 박사가 이런 추리를 하는 거냐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찰(절)에 대한 상식은 대체로 불교와 관련될 걸로 알지만 사실 그 전에도 사찰(절)은 있었습니다.
도교(道敎)와 관련한 사찰이 그것입니다. 중국 도교가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 도교, 선가(仙家)사상이라고도 하고 풍류도(風流道)라고도 불리며 단군(檀君)을 시조로 모시는 암자, 사찰 등이 전국에 이미 부지기수로 널려있었죠.
제가 의정부 지명밟기 이야기 시리즈 21–‘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에서 잠시 빼먹고 넘어온 내용 중 하나가 있는데, 하늘의 자손, 천손족(天孫族)이자 동명족(東明族)인 배달국 고조선의 자손들은 나라를 세울 때 퇴각 시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지를 반드시 확인한다는 내용을 빠뜨트리는 실수를 저질렀었습니다. 그럼 고조선의 자손들은 어디서 마르지 않는 샘을 찾을까요? 주로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사찰에서 그 샘을 찾곤 합니다. 도교 사찰도 사람이 살아야 하는 곳이니까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야 하는 법이거든요.
자! 이 정도면 이제 ‘회룡사(回龍寺)’의 어원도 충분히 의심할 준비가 되셨겠죠?
어찌되었든 수원형님이 온조대왕과 관련한 ‘용의 우물(용정(龍井))’이라 주장하는 샘을 찾아 우리는 가파른 골짜기를 힘겹게 올라갔습니다.
주로 땅보다는 바위로 이루어진 길이라 망월사(望月寺)로 올라가는 길은 관절에 무리가 오는 길이더군요.
“형. 아직 먼 거야?”
“조금만 더 가면 망월사요. 저 고개만 넘으면 바로 나옵니다. 신박사님.”
그러나 망월사는 몇 번의 고개를 넘어도 모습을 나타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등산 하는 사람들의 ‘여기서 가까워요.’라는 말은 절대로 믿지 말라는 교훈을 되새기게 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아무리 올라가도 망월사는커녕 망태기 하나 나타나지를 않으니 원.
불룩한 배에 짧은 다리를 가진 신동명 박사는 하는 수 없이 버려진 나무 하나를 지팡이 삼아 걷고 또 걸었습니다. 무릎은 아프고 관절은 “이러다 다 죽어.”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댔지만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욕망의 정신계(精神界)는 발걸음을 쉼 없이 내딛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올라선 망월사(望月寺) 입구.
“와. 되고도 되다.”
고된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우리를 제일 먼저 반긴 건 몇 백 년이 넘은 고목나무 의자였습니다. 거대한 고목을 움푹 파서 나그네들에게 쉬는 시간을 허용하는 고목나무의자에 앉으니 긴 호흡으로 내뿜는 한숨과 함께 주루룩 흘러내리는 한소끔의 땀만이 올라오는 동안의 고통을 표현해줄 뿐이었습니다. 땀구멍을 열고 쏟아지는 땀을 주체하지 못 하는 모습에 수원형님이 보기가 안타까운 지 가방을 열어 손수건을 내밀어 땀을 닦으라 권합니다.
극한의 가뭄 속에서도 마르지 않는 샘은 ‘해탈문(解脫門)’이라는 푯말을 달고 우리를 반겼습니다. ‘해탈문(解脫門)’을 들어선 내 행동의 시작은 그동안의 고생을 한방에 날리는 함성으로 시작되었죠.
“와~.”
기존에 보던 샘물터가 아니었습니다. 향유고래처럼 거대한 바위 아래 맑은 물이 가득 고인 우물이 눈을 파고드니 왜 함성이 아니 나오겠습니까!
순간 이 바위가 거대한 이무기나 용으로 보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위 밑의 샘을 배경으로 이렇게 저렇게, 앉았다 섰다. 연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선하고 예쁘게 생긴 보살님이 매점 같은 사무실에서 나오시는 게 아니겠어요?
밖이 어수선 하니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얼굴을 내민 거 같았습니다. 붙임성 좋은 수원형님이 다가가 보살님께 말을 겁니다.
“12시에 만나요. 브라보 콘 두 개만 주세요.”
와! 산꼭대기 망월사에서 브라보 콘이라니. 혀를 통해 부드러운 꿀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세상에 피로가 봄눈 녹듯 녹아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온조대왕님의 용우물을 찾으러 왔습니다.”
“이곳이 용우물인가요?”
“그렇습니다. 온조대왕님이 밤마다 바다로 나갔다 돌아오는 용우물이 분명합니다.”
“아. 그럼 앞으로 망월사가 더 유명해지는 건가요? 용우물 때문에.”
“그렇죠. 우리 신박사님이 멋지게 용우물로 스토리텔링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될 겁니다.”
“그럼 망월사가 북적이겠군요. 저도 이 우물을 보면서 뭔가 있겠구나 생각했었어요.”
“앞으로 엄청나게 브라보 콘 많이 팔릴 겁니다.”
6시에 의정부에서 사람을 만나기로 하여 내려오는 발걸음은 급했습니다.
그러나 돌무더기들과 가파른 비탈은 펭수의 발을 단단히 묶어 놓는 게 아니겠어요.
“급하게 내려오면 다리 부러집니다. 천천히 내려오세요. 신박사님.”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내려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정리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수원형님이 주장한 망월사의 ‘용의 우물(용정(龍井))’은 샘으로 보기에는 너무 웅장했다는 거. 과거에는 지금의 건축물이 없었다고 하니 이건 샘(泉)이 아니라 소(沼). 정확히 표현하면 ‘용의 연못, 용연(龍淵)’이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온조국(溫祚國)의 온조대왕이 이 가파른 산꼭대기까지 고행하듯 매일같이 올라왔을 것인가를 생각했을 때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맹점 세 번째 ‘백제 위례성 우물 설화’에 보면 우물은 위례성(慰禮城) 안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게 가장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수원형님이 주장하는 망월사의 우물이 ‘용의 우물(용정(龍井))’이라면 ‘위례성 우물 설화’가 아니라 ‘이성산성 우물 설화’여야 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 망월사(望月寺)의 ‘용의 연못’은 ‘위례성의 용우물(龍井)이 아니다.’
수원형님 미안하고, 예쁜 보살님 죄송해요. 제가 볼 땐 그곳은 아닌 걸로. 그러나 고구려 오녀산성의 천지(天地)보다 더 멋지고 웅장한 ‘용연(龍淵)’인 것만은 분명하다는 거. 흑.
아. 이러면 ‘회룡(回龍)’과 관련하여 앞에서 제기한 모든 주장은 폐기처분 되는 것인가?
그럴리가요! 그런 일이 있을 거면 애초에 글을 시작도 안했을 신동명박사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이제부터 ‘용의 우물(용정(龍井))’은 어디에 있었고, ‘회룡(回龍)’이라는 지명은 누구와 관련된 건지에 대하여 마무리 정리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이 지금의 ‘서울동원예비군훈련장’으로 상전벽해(桑田碧海)하는 과정에는 과수원이라는 중간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 다행이도 그 과수원집이 제 후배(이동훈. 57세)이고 그의 형(이순길. 65세, 과수원집 큰 아들)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듣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죠.
과수원 입구에 아주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은 ‘서울동원예비군훈련장’으로 변해서 우물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마을 주민들이 모두 이용하였지요.
근처 동네 외미에서 태어난 김경곤(60세) 등의 여러 친구들도 “과수원 안에 있는 친구 집 앞에 우물이 있었다.”고 증언함으로써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인 ‘회룡분지(回龍盆地)’ 안에 우물이 있었음을 확인시켜주었죠.
임금이 숙소에 나아가 헌수하니, 태상왕이 조용히 이르기를,
"양도에 내왕하여 백성들이 생업을 편히 하지 못하였는데, 이제부터는 정해 살 수 있겠는가?"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하고, 이내 모시고 잤다.
(태종실록 10권, 5년(1405 을유 / 명 영락(永樂) 3년) 11월 6일(무술) 1번째 기사)
한걸음 더 나아가 김경식(66세, 향토사학자, 이담문학 회장, 흥선문학 회원)은 태종 2년 12월 8일. 이성계와 이방원이 황해도 금천의 금교역에서 최초 화해의 자리를 가진 이후, 3년 뒤에 두 사람이 의정부 호원동 전좌(殿座)마을에서 만나 다시 회합의 자리를 아래와 같이 소개 하면서
이때 태종 이방원이 태상왕 이성계에게 바친 것은 술(酒)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용샘(龍泉)’에서 물을 떠와 두 번 바친 사건이다. 의정부시는 이 ‘용샘(龍泉)’을 지켰어야 했는데 방치하여 사라지도록 한 죄 값을 언젠간 치르게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아~. ‘회룡분지(回龍盆地)’에 이미 ‘용정(龍井)’이 있었구나.
‘회룡사(回龍寺)’ 무학대사 사건 이전에 ‘용샘(龍泉)’은 이미 있었구나!
그렇다면 ‘회룡(回龍)’이라는 말은 이미 그 이전에 사용되고 있었겠구나!!
‘회룡(回龍)’이라는 말은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어 돌아오기 전에 이미 이 동네에서는 사용되고 있었겠구나!!!
그렇다면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인 ’회룡분지(回龍盆地)‘와 ’회룡사(回龍寺)‘는 온조대왕과 관련된 지명일 가능성이 매우 매우 무지 무지 높은 것이겠구나!!!! 움화화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