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뉴스와이드 김건화 칼럼 관리자 기자 |
''자네~ 혹시 말이야! 역관 집안에 불과했던 이토히로부미가 과연 어떤 자였는지 아는가? 조선인 이름은 림춘모일세! 그자는 본시 영길(영국)이 놈들이 왜족을 앞장 세워 우리 국토를 집어 먹기도 전에 1850년대 당시, 아버지 림세장을 따라 대륙에서 이곳 소도(한반도)로 넘어 온 자일세! 그때는 우리가 아시다시피 이땅 소도에 조선 인민들의 수는 겨우 600만을 넘지 않았던 시절 아니었던가! 림춘모가 이 땅 소도에서 살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결혼 해 벼락출세 할 줄은 누가 알았겠나?
그런 그가 조선통감부 통감이 되고 난 후 제일 먼저 한일이 뭐였겠나? 바로 갑종,갑지 을종,을지 이주정책이었어! 말하자면 대륙조선인들을 이 땅 소도에다가 제다 퍼부어 수백년 째 600만 전후의 인구가 1300만으로 폭증한 것은 다름아닌 림춘모의 간계였더란 말이지...
암튼 이제 림춘모가 조선통감부 통감을 퇴임하고 일본 천황을 모시는 추밀원 의장에 취임했네! 그 영감이 한국을 떠났지만 아직 조선 인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어. 게다가 한국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삼키고 싶어서 안달인게야....'’
영화 '하얼삔' 시나리오 의뢰를 받고 초반부 초기 장면의 대사를 통해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 에 입각한 대의와 림춘모가 생각하는 대의가 충돌하는 두개의 시선에 방점을 두고서 균형을 잡으려 했었던 지난 날, 일단 거기까지 쓰고 나니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하얼삔에서 세발의 총탄을 맞고 '빠가야로~ 네가 진정 대의를 저버리는구나!' 하고 한탄 했었다는 림춘모의 대의는 과연 그가 진정 한일병합의 온건파 입장에서 현실을 견지한 시대 선구자적 역할이라도 자처 한 것이었던가! 하는 의문 정도는 가질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친일 행각을 일삼았던 콜라보 세력의 중심 인물 이토히로부미 에게서도 스스로를 자처한 대의 정도는 있었던 것으로 읽혀지는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70년 후,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내뿜은 김재규의 총탄에서의 대의 또한 우리는 재조명 해 볼 필요가 있다.
법정 최후변론의 기록에 남아있는 우국충정의 발로에 의한 민주주의 사생결단 이었다는 김재규의 진술을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김재규의 우국충정에는 기실 찬반논란은 있겠으나, 그의 녹취록은 독재에 대한 항거와 저지를 위한 희생의 거사였다는 것에 진심이 담긴 우국지기였음이 여실히 드러나 보이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18년 내리 적자 경제거품지표임에도 당시 언론 나팔수들이 거짓 선동하고 포장한 박정희의 가면을 벗겨 볼 필요가 있겠다 싶은 나머지 앞서 말한 '하얼삔' 시나리오의 도입부를 거치고 중반 이후의 대목에서 주장 인물이 토로하는 장면은 위와 같이 김재규의 법정 최후변론을 토대로 한 소재를 할애하여 시나리오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자네 지금부터 내말 잘 듣게! 김재규 사후 30년이 지났건만, 이땅에는 아직도 태극기 부대와 같이 보수라고 자처하는 철부지 인간들로 득실거리는 현실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네! 자네는 민주주의 반대말이 무엇이라고생각하나?
글쎄! 아마도 파쇼 독재, 또는 독재주의 정도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
역시! 자네답군!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독재가 횡행하니 공산주의를 마치 민주주의 반대말로 착각하는 수가 많더군! 지금까지 겪었던 대한 헌정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표방만 가득한, 그러나 현안의 실정을 살펴보면 독재로 점철 되어진 이승만12년, 박정희18년, 전두환7년, 노태우 5년을 무려 42년 간의 폭압에 시달리고 독재에 지배당한 사실들을 간과하고 숨겨왔던 세월이 아니었던가 말일세! 세상을 너무 오래 살다보니 우리 국민들이 독재정치에 체화된 나머지 무엇이 독재인지조차 망각하고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더군!
그래서 자네 하고 싶은 말은 대체 뭔가? 그렇게도 뜸을 들이니 말일세!
우선 박정희 사례부터 짚고 감세!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얼마전에 쓴 '독재 폭압으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 이라는 칼럼을 한번 인용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그래~ 그런 것도 있었어?
먼저 그는 정권을 잡기 위한 쿠테타를 감행, 성공한 후 무능한 장면정부하에서 신음하는 민중과 국가를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토로한바 있다. 그러나 그는 이승만 정부에서 두번이나 살아남은 전력이 있다. 그가 말한 구국결단은 기실 당시 미군정과 합작한 이승만의 방해로 반민특위에서 살아남았고 공산주의자였던 이력임에도 같은 동지들을 밀고하고서 간도특설대 출신인 백선엽의 보증으로 구사일생한, 그럼에도 그러한 정부를 전복할 명분으로 구국을 내세워 쿠테타 실행 계획을 세웠던 터였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거센 4.19에 밀려 수포로 돌아가 실행되지 못했다.
장면정부가 들어선 이후 다시 반민특위가 부활한다는 첩보를 김종필에게 전해듣고서 고작 지한몸 살기 위한 몸부림을 구국 결단이라는 명분으로 위장한 채 가면을 뒤집어 쓰고 이승만 때 실행하지 못한 쿠테타를 실행하게 된다. 그랬던 그의 처신을 놓고 당시 케네디 정부에서는 스네이크 박이라는 별명을 붙혔다.
간도특설대 시절에 혼자서는 말도 없고 친구도 없던 사람이 독립군 소탕 명령만을 기다렸다가 신호가 떨어지면 기가 충전되어 환호성을 지르며 선두에 나서는 것을 보고서 당시의 동료들은 그를 돌 아이로 여겼다고 한다. 일본육사시절에는 모든 과목에서는 낙제였으나 오직 교련과목에서만 두각을 나타내는 비대칭 성적의 소유자였다. 쿠테타 성공 이후 군사정권의 명분과 함께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자신의 신분세탁을 위한 위장이 무엇보다 절실했던 터였기에 반공은 정권유지의 보증수표 그 이상이었다. 반공을 효시로 낮에는 막걸리 밤에는 시바스리갈로 딸년보다 더 어린 여대생에서부터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신혼의 유부녀를 납치하고 남편은 미국 하와이로 내쫒기까지 하는 섹마의 정신병자이기도 했다.
글로벌 스텐다드인 의회양원제를 폐지 시키고 제왕적 대통령제인 국회단원제를 고쳐 쓴 제3공화국과 유신헌법을 강제한 4공화국까지 독재 제도를 기초하여 총통 체제를 꿈꾸었던 족적이 너무나도 선명한 행보였으나, 기실 그는 18년동안 세뇌우민 양성 정책의 지속강화 관료화와 반공사회 시스템을 작동 유지시킨 국정운영으로 인식 마비와 문화지체의 양민들을 대거 생산한 독재자에 불과했다. 소탈하고 청렴한 이미지는 서슬퍼런 철통 군사독재정권 하에 미화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만든 허상이었고 실지로 그의 일가와 친척들의 비리 그리고 그의 재산축적에 비하면 대한민국 헌정사에 드러난 역대 대통령들의 진상은 오히려 조족지혈 수준이다 라고 말할 수 있었네! 하지만 여기까지만 하지! 이와 같은 것을 놓고 본 다면 진의와 허상, 팩트와 페이크를 가릴 줄 아는 사유의 힘이 얼마나 절실 한지 나는 다시 한번 깨닳는 중일세!
음! 듣고보니 자네는 그말이 하고 싶은던 거였군! 민주주의를 역행한 독재를 찬양하고 민의를 폭압한 신군부 세력들의 편에서 작은 편린일지라도 수혜를 본 자들이 지금에 와서 적반하장격으로 그동안 독재에 항거했던 수 많은 민주 세력을 폄하하며 오히려 독재 정치라고 몰아 세우는 작금의 기득권 세력들에게 정문일침 이라도 가하고 싶은던 것이었어! 아니 생각하면 때려 죽이고도 싶었던 거겠지!”
영화 “하얼삔” 시나리오는 끝내 탈고하지 못했으나, 나에게도 그 글을 공유한 지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 나름의 의미가 컸다.
이토히로부미의 본명인 림춘모를 저격한 안중근에게는 동양 평화론이라는 대의명분이 있었고, 다까기마사오의 본명인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는 민주주의 사생결단이라는 대의명분을 걸었다. 이토히로부미로부터 다까기마사오까지 70년, 임진년 선조시절 명랑으로부터 청산리까지 323년이 걸렸다.
영길(영국)이로부터 아묵가리(미국)까지 이어진 큰 일본은 열도의 작은 일본을 앞장세워 분탕질 된 오역의 역사를 오늘날 까지 민중에 심어 놓은지 벌써 130년이 넘어 간다.
나라를 망친 독재자를 찬양했던 곡학아세하는 어용학자들이나 에드버토리얼 수준의 기사를 내뿜었던 언론의 허위정보에 춤추는 이땅의 수많은 우민들도 이제는 깨어나고 적폐처단을 위한 담대한 투쟁이 지속되는 역사에 동참해야 할 이때에 진정한 보수가 탄생할 토양마져 갖추지 못한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 사쿠라들이고 독재를 찬양하는 것은 미숙한 철부지들이며, 진정 보수라 하면 적폐 처단에 동참하고 역사를 정립하여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것을 우선으로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보국안민의 뜻에 가까이 하는 진짜 보수가 아니겠는가!
1597년 이순신 명랑대첩에서 일본군 격퇴
1909년 안중근 하얼삔에서 이토히로부미 저격
1920년 김좌진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 격퇴
1979년 김재규 궁정동안가에서 다까기마사오 저격
오늘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인 공통점은 10월 26일이다. 어떤 조화가 이런 기가막힌 순간들을 낳았을까! 생각해 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