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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일반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인문학 강연

-동학대접주 김덕명 장군과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2023년 길 위의 인문학, 호남평야의 중심-김제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뿌리를 찾다.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은 8월 31일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한국도서관협회 주관, 금구도서관 시행, ‘동학대접주 김덕명 장군과 동학농민혁명 이야기’제목으로, 김제시 금구면 행정복지센터에서 강연을 가졌다.

강연의 취지는 ‘2023년 길 위의 인문학, 호남평야의 중심-김제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뿌리를 찾다.’이다. 주제는 이윤영 관장의 저서 <동학농민혁명 장편소설 ‘혁명’을 중심으로 그동안 동학관련 저술 책자 속에서의 ‘김덕명 장군과 금구 원평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혁명’ 이야기>이다.

강연 1부는 ‘금구·원평 동학대접주 김덕명의 일생’이며, 2부는 ‘이윤영 동학농민혁명 장편소설 <혁명>책속으로’강연을 하였다. 또한 3부는 이윤영 관장 출연 TV 동학기행 영상을 관람하였고, 끝으로 질의응답시간을 가졌다.

 

*강연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김덕명(金德明.1845~1895)장군의 이름은 준상(埈相) 이요, 자는 덕명(德明)이 고, 호는 용계(龍溪)요, 본관 은 언양(彦陽)이다. 덕명은 학문에도 능했으며, 건 장 한 체격과 언변이 유창했고, 불의와 비리를 참지 못 하는 의기를 지니고 있었다. 덕명은 1883년 보국안민의 경륜과 변혁의 뜻을 품게 되었으며, 42세가 되는 1886년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선생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김덕명은 금구 원평을 중심으로 태인과 김제, 익산, 고부 등지에 걸쳐 포덕(포교)를 많이 하여 전라도에서 이름난 동학지도자로 부상하였고, 그의 휘하에 많은 접주들을 거느렸는데, 그중에서 전봉준 접주가 대표적 인물이다. 덕명은 해월 최시형 선생과 사제지간으로서 해월선생의 가르침인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 등 동학사상을 실천하는데 모범을 보였다.

 

김덕명은 1892년 11월 교조신원운동의 삼례대회와 1893년 3월에 금구 원평에서 교조신원운동에서 1만여 명의 동학교도를 소집하여 위세를 떨치기도 했으며, 덕명의 명성은 조선정부와 전국에 알려질 정도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또한 덕명은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 기포에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과 함께 주력을 이루었다. 황토현, 황룡촌 승전, 전주성 점령 후 청·일 외세개입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민관상화의 전주화약과 폐정개혁에도 원평집강소를 비롯하여 전라도를 중심으로 민주자치시대를 여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1894년 6월(양.7월) 조선의 심장부 경복궁을 점령 고종 국왕을 포로로 잡고 조선군 무장을 해제, 친일내각을 구성하는 등 조선 지배를 위한 국권침탈을 자행하자 전봉준과 김덕명 등은 동학의병들을 규합하여 9월 초 금구원평에서 결의하여 삼례에서 2차기포를 일으킨다.

*(일본군의 국원침탈에 의한 동학농민혁명 2차 기포, 독립유공자 서훈에 대한 당위성 강조)

해월 최시형 선생은 의암 손병희 선생에게 동학혁명군 대통령 직책을 임명하여, 전봉준과 함께 동학의병항일전쟁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한다. 전봉준.김덕명.손병희 등은 끝내 우금치 등 공주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배하고 후퇴를 한다. 전주를 거쳐 11월 금구 원평과 태인전투를 마지막으로 2차 동학농민혁명군 주력부대는 해산한다.

 

김덕명 장군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빠질 수 없는 5대장군중에 한 명이다. 덕명은 전봉준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으며, 후원자는 물론 혁명군 ‘총참모장’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덕명은 원평 최후전투 후에 전봉준과 해어진 후 안정 절골로 피신하였으나, 태인 수성군에게 1895년 정월 초하루에 피체되었다.

 

수성군은 김덕명에게 굵은 나무를 어깨에 얹고 십자형으로 팔을 벌려 묶었다. 더욱 비참한 것은 덕명의 상투를 뒤로 젖혀 나무에 묶고 얼굴이 하늘을 향하도록 했으며, 피체과정과 고문에 의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갔다. 덕명은 결국 일본군에게 넘겨져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며, 전봉준.손화중.최경선.성두환 등과 함께 재판을 받고 1895년 3월 30일(양.4.24)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