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피휘(避諱)'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장에 선왕(先王)의 이름자나 중국의 연호자, 성인(聖人)이나 선조(先祖)들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공경과 삼가는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획의 일부를 생략하거나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치하는 언어관습.’을 뜻합니다. 즉 '특정 인명이나 이름의 글자 쓰는 것을 꺼려 피하여 표기하는 방법'을 말하는 거죠. 태조 이성계의 예를 들어보면 조선 국왕으로 즉위한 후 이름을 일부러 ‘旦(아침 단)’으로 바꿉니다. 왜냐? 이름을 두 글자로 줄이고 어려운 글자를 사용하게 되면 사람들이 쉬운 글자를 선택할 수 있고 피휘할 글자가 많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피휘를 씀에 불편을 최소화하려는 나름 위민정신(爲民情神)! 군주의 이름을 피하는 것을 국휘(國諱), 집안 조상의 이름을 피하는 것을 가휘(家諱), 성인의 이름을 피하는 것을 성인휘(聖人諱), 원수지간인 사람의 이름을 피하는 것을 원휘(怨諱)라고 합니다. 피휘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대자(代字)라고 해서 피할 글자를 소리가 같거나 비슷한 다른 글자로 대체해서 쓰는 방법. 결자(缺字)라고 해서 피할 글자를 쓰지 않고 공백으로 남겨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박근혜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일본 정부가 사죄를 표명하고, 위안부 피해자 지원재단에 10억엔(약 107억원)을 출연하는 대신,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고 인정하는 내용의 한일 당국의 합의를 피해당사자들과 사전 협의없이 비밀리에 진행하여 발표했다. 이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가족을 대리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2016년 3월 헌법소원을 냈다. 2019년 12월 30일 헌법재판소는 ’12·28합의가 위헌임을 확인해달라’며 낸 헌법소원 사건을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각하 결정했다.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위안부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선 곳은 민간단체들이다. 1992년부터 일제강점기 당시 정신대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중에 정의기억연대(옛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소속 할머니들의 주도로 서울 종로구 중학동에 있는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측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하는 항의 집회가 30년째 열리고 있다. 9월 7일에는 “제1560차 일본군 성노예 문제해결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렸다. 최근에는 이를 반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의정부 금오동 산45-20(산장 아파트 옆)에 있는 ‘의순공주의 묘(족두리 묘)’에 가보셨나요? 가보신 분들은 깜짝 놀라십니다. 이건 묘가 아니에요.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쥐가 파먹은 것 같은 모양을 한 묘를 보는 순간 마음의 바닥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왕도 못 한 조선 백성의 목숨을 구한 여인.’의 묘라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관리 상태에 놀란 입을 닫을 수가 없죠. 그런데 말입니다! 더 놀라운 건 지금의 이 묘마저도 앞으로는 볼 수 없게 될 거라는 사실. 도시계획상 의순공주묘를 완벽하게 치고나가는 도로(道路)가 진행 중이니까요. 현재 이 도로는 의순공주 묘 앞 100m앞 까지 도달되어 있습니다. 바로 코앞까지 온 거죠. 나라를 구하였으나 살아서는 환향년이라 손가락질 당하고, 죽어서도 편히 쉴 공간조차 사라져야 하는 의순공주의 현 상황. 살아있는 우리가 의순공주를 두 번 죽이고 있는 겁니다. 지금. 문화관광과 공무원에게 물었습니다. “평소에 묘 관리도 안 되고, 새로 도로가 나면 의순공주묘가 사라진다는데 왜 그러는 겁니까?”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서 그래요.” “그럼 문화재로 지정을 해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내가 그날 그 골목에 들어섰던 때는 중3 시절이었습니다. 어스름한 저녁 빛이 깔린 골목에 들어설 즈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둥그렇게 모여 웅성웅성 대는 모습을 발견했죠. 무슨 일인가 보니 ‘양공주’ 누나의 머리에 피가 터져 철철 흐르는데, 머리채를 움켜잡은 미군 흑인 병사 놈은 누나를 계속 때리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난리굿을 치는데 아무도 말리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가만히 보니 그 누나는 미군부대 PX에서 사온 물건을 저녁이면 우리 집에 팔러오는 낯익은 누나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리를 높게 들어 양키의 허벅지를 발꿈치로 냅다 찍었고 간신히 누나의 퇴로를 만들어 줄 수 있었죠. “누나. 어서 빨리 도망가세요.” 그때서야 사람들은 “병원.” “앰블란스.”를 외쳐댔습니다. 허벅지를 붙들고 일어선 양키는 겁에 질려 “쏘리, 쏘리”를 외쳤고 상황을 종료 시킨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죠. “동명이 네가 왜 나서?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럼. 누나들이 맞는 데 가만있어요?” “쟤네들이 무슨 인간이냐? 저것들 맞아도 싼 년들이야.” “아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조선마술사'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나요? 여자보다 더 예쁘다는 '유승호'와 응답하라 1994에서 인기를 끈 ‘고아라’가 주연을 맡은 영화 ‘조선마술사’ 이 영화가 의정부 금오동 산45-20(산장 아파트 옆)에 실제 있었던 슬픈 역사를 배경(모티브)으로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으실 겁니다. 청나로 끌려간 비운의 여인, 나라의 힘없음이 만들어낸 희생자, 위기의 조선을 구하고 환향년(還鄕女)이 된 우리의 자화상(自畵像), '의순공주(義順公主)의 이야기'는 다양한 장르에서 다루어졌습니다. 특히 연극계에서는 여러 번 다루어졌죠. 그 대표적인 연극 중 하나가 ‘극단 허리’에서 연출한 ‘환향(還鄕)’입니다. 때는 병자호란(丙子胡亂) 인조임금이 청나라의 침략에 굴복하고 머리를 땅에 3번 부딪쳐 피 흘리며 항복했다는 '삼전도의 치욕' 사건을 지나, 함께 청나라에 8년 간 볼모로 끌려갔던 형 소현세자의 병사로 동생인 봉림대군이 효종대왕이 되어 정사를 보던 1650년(효종 1) 3월의 일입니다. 조선을 삼킨 청나라는 내정간섭을 하기 위해 억지조공을 강요했는데, 그 핑계가 처녀 인피 300장과 남정네 불알 3말을 구해 오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광복절 제77주년 기념일인 15일 오후 5시 광주 광산구 월곡동 다모아어린이공원에서는 항일독립운동가인 홍범도 장군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홍범도 장군 유해 국내 봉환 1주년을 맞아 진행된 제막식에는 강기정 광주시장과 홍우표 추진위원장, 신조야 (사)고려인마을 대표를 비롯해 시민과 고려인 후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제막식 부제는 ‘바람이 되어 카자흐스탄에서 월곡으로’였다. ‘광복군 아리랑’ 퍼포먼스와 함께 ‘부죤놉카 군모’를 쓴 홍 장군의 모습을 형상화한 흉상(조각가 김희상 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흉상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모신 장군의 흉상을 모형으로 재현한 것이다. 일반 시민들에게 홍범도 장군은 항일 무장투쟁가인 의병장으로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영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홍범도 장군 흉상이 광주에 처음 세워진 데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홍범도 장군이 광주와 인연을 맺게 된 건 월곡동 고려인마을에 자리한 ‘월곡고려인문화관’(관장 김병학)이 작년 8월 ‘홍범도 장군 특별전’을 연 게 계기가 됐다. 홍 장군 유해 봉환을 기념해 열린 특별전에는 김병학 관장이 카자흐스탄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기원전 18년에 온조(溫祚) 왕자(王子)는 온조국(溫祚國)을 세우고 온조 대왕(大王)이 됩니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라고 아래의 글은 증명합니다.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서울 송파구(구청장 서강석)가 15일 77주년 광복절을 기념해 내건 현수막에 ‘건국절 74주년’이라고 함께 명시해 선열들의 항일독립운동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송파구청 전면에는 ‘77주년 광복절, 74주년 건국절’이라고 적힌 현수막과 ‘빛을 되찾은 그날, 나라를 세운 그날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서강석 구청장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송파구청과 27개 주민센터에 일제히 77주년 광복절뿐 아니라 74주년 건국절도 기념하는 플래카드가 걸렸다”고 밝혔다. 페이스북에는 현재 120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찬반이 팽팽한 것같다. 또 송파구청 홈피의 ‘구청장에게 바란다’에는 건국절 현수막 창피하다는 게시글들이 줄을 잇고 있다. 서 구청장은 1945년 8·15해방은 1948년 8·15 건국을 하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었다고 전제하고, “1945년 8·15부터 1948년 8·15까지 미군정 시대였고 백성들이 드디어 주인으로 등극한 날이 1948년 8·15 건국절이다. 74주년 건국절이 77주년 광복절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다른 이유로 “광복절은 자유민주주의자, 공산주의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1923년 1월, 단재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다. 내년이면 선언 100주년이다. 단재는 첫 구절부터 일본을 강도(强盜)로 부른다. 왜 강도인가?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기 때문이다. 또 단재는 일제가 운영하는 학교를 ‘노예양성소’라 규정하고, 조선사람으로 학교에서 가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면, “단군을 무(誣)하여 소잔명존(素盞鳴尊, 스사노오 노미코토)의 형제라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 말은 단군을 일본의 신(神)인 스사노모의 형제로 비유한 것이 잘못된 무고(誣告)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 이 말은 어디서 나온 말인가 그 유래를 알아보자. 1892. 8, 일본인 임태보(林泰輔,하야시 다이스케)가 쓴 <조선사>는 최초의 조선사 연구서로 알려졌다. 자칭 서양으로부터 배운 근대적 연구성과를 토대로 썼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사를 4기로 나누었다. 한군현(漢郡縣) 이전을 태고(太古), 삼국의 정립부터 신라 경순왕까지의 대략 992년을 상고(上古), 고려 태조부터 공양왕까지의 대략 456년을 중고(中古), 조선 태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의정부를 다시 품다. 1 '의정부'라는 도시의 명칭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어떤 역사적 내용을 품고 있기에 조선시대 행정기관의 이름을 도시의 이름으로 쓰게 된 것일까? 참으로 궁금해 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의정부라는 도시 명(名)에는 숨어 있습니다. 의정부에 사시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내용은 보통 이렇습니다. 조선조 1400년 2차 왕자의 난 이후 방원은 제 3대 태종이 되었으나 태조(이성계)는 감정을 참지 못해 고향인 함흥으로 간다. 이에 태종은 여러 차사를 보냈지만, 부왕인 태조도, 차사와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부터 함흥차사란 말이 생김) 이후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태조는 환궁을 하게 되고 태종은 지금의 호원동 전좌 마을까지 나와 부왕 태조의 환궁 환영 준비를 하는 가운데 신하의 의견으로 아름드리 나무로 고주 기둥을 세우는데 때마침 도착한 부왕 태조는 태종에 대한 노기가 충천하여 활궁에 철전을 매어 잡아 당겼으나 살은 연대에 꽂히고 태종은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 때부터 "연대가 맞아야 산다."라는 말이 생기게 됨) -의정부애향회 카페 글 부분 인용